서울의대 역사스케치


서울대학교병원 ‘시계탑’, 건립 110주년을 맞다




김상태 교수(의학사연구실)



서울대병원의 랜드마크 ‘시계탑’



서울대병원 랜드마크 '시계탑'(2007)



서울대병원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강탈’하는 건물이 하나 있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근대 유럽풍의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2018년 새해를 맞아 만으로 백열 살이 되었다. 건립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아치형의 현관, 곳곳의 태극 문양, 지붕 위의 액세서리 조형물 등 건축미학 측면에서도 아름답고 독특하다. 그 뒤로 13층짜리 병원 건물이 우람하게 자리 잡고 있건만, 고작 2층짜리 건물인데도 존재감이 조금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이 건물은 서울대병원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곳이고, 서울대병원의 역대 교직원들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은 물론 그 동안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와 가족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의 근대 문화유산 중에서 역사적 가치와 미적 가치를 동시에 지닌 대표적인 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1976년에 문화재(사적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시계탑 부분이다. 그래서 서울대병원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 건물 전체를 ‘시계탑’이라고 불러왔다. 그렇다면 이 시계탑은 언제 건립되었을까? 어떤 건물이었을까? 110년 동안 어떤 변화를 겪어왔을까?



‘시계탑’의 탄생

1885년 고종과 조선정부는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설립해 서양의학의 도입을 통한 의료 근대화와 공공의료의 실천에 힘썼다. 이어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은 제중원의 정신과 경험을 살려 의학교(醫學校), 광제원(廣濟院), 대한국적십자병원(大韓國赤十字病院) 등을 운영했다. 1907년 대한제국은 이 국립 의료기관들을 하나로 통합해 초대형 국립병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병원이 바로 대한의원(大韓醫院)이다.

대한의원은 당대 동아시아 전역에서도 손꼽을 정도의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초대형 최신식 병원이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전문 분과로 구성된 근대적 종합병원이었다. 부속 의학교에서는 체계적인 교과과정을 마련해 4년제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오늘날의 보건복지부가 없었던 상황에서 종두 사무, 전염병 방역 등 보건위생 행정을 담당했고, 빈민층의 무료진료 등 공공의료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시계탑’은 바로 대한의원의 본관으로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1908년 완공 당시의 '시계탑'



대한의원의 외래진료와 수술, 각종 검사, 약 처방, 수납, 행정업무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2층의 대부분의 공간은 강의실이었고, 부속 의학교의 의학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본관 뒤로 병동들과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왜 시계를 설치했나?

병원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진료시간, 수술시간, 수납업무 시간 등을 정해놓은 것은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 사이의 약속이자 규율이다. 효율적인 진료를 위해서 시간 엄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병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한의원이 개원할 무렵 우리 국민들은 매우 가난했고 근대화도 늦어서 시계가 굉장히 귀했다. 그래서 대한의원의 가장 높은 곳 3면에 대형시계를 설치해서 어디서든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대한의원 본관에 시계를 설치한 두 번째 이유는 대한의원이 대한제국의 국립병원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여러 종류의 시계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을 떠올려 보자. 예로부터 황제나 국왕은 하늘의 움직임을 정확히 읽어서 백성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권리이자 백성에 대한 의무였다.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은 그런 전통에 근거해서 대한의원 본관에 시계를 설치한 것이다.

당시에는 시계탑이 있는 건물이 경복궁, 종로의 한성전기주식회사, 그리고 대한의원 등 단 세 곳이었으므로 대한의원 본관은 장안의 명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창경궁에서도 시계를 보려고 마등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시계탑’의 역사

1908년에 완공된 ‘시계탑’은 1911년에 한 단계 도약을 이루었다. 본채에 이어 이른바 동서 날개채가 증축된 것이다.




1911년 증축 이후의 '시계탑'



동쪽 날개채에는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의 진료실과 연구실이 자리를 잡았다. 서쪽 날개채에는 계단식 임상강의실, 기존 수술실보다 더 크고 새로운 수술실(주로 산부인과에서 사용), X선 촬영실과 전기치료실 등이 들어섰다. 특히 임상강의실은 1978년까지 우리나라 근현대 의학교육의 요람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다. 1917년에는 정형외과가 외과에서 독립되면서 X선 촬영실 옆에 진료실을 마련했다. 이와 같이 ‘시계탑’의 외연과 역할은 확대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우리나라가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던 바로 그 순간에 ‘시계탑’에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의 한국인 의료진이 해방 소식을 듣고 ‘시계탑’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갓을 쓴 노인 한 분이 홀연히 나타나 시계의 아래 부분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누군가 노인의 말을 알아듣고 ‘시계탑’ 안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 탑신 아래의 일장기를 닦아냈다. 그 순간 거기서 태극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계탑' 탑신 아래의 태극 문양


일본인들이 감춰놓았던 태극 문양을 해방과 동시에 되찾은 것이다. 1908년 대한의원 공식 개원에 즈음해 제작된 개원기념 사진첩과 당시 의학생들의 졸업증서에 태극 문양이 사용된 점을 감안하면, 애초 ‘시계탑’에도 태극 문양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1979년 2~3월경, ‘시계탑’은 비운을 맞게 되었다. 임상강의실(당시 주로 3학년 임상강의)을 중심으로 한 서쪽 날개채 부분이 해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건물이라는 이유로 정치권에서 해체를 요구했다는 설도 있고, 서울대병원에서 주차장 건립을 위해 해체를 추진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동쪽 날개채의 해체는 막을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미주 동창회와 서울대병원 교직원들이 서울대병원의 상징인 ‘시계탑’을 지켜낸 것이다.

그 후 ‘시계탑’은 조금씩 바람직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1987년 ‘시계탑’ 앞에는 우리나라 종두술의 선구자이자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학생감을 역임한 지석영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1992년 ‘시계탑’ 2층에는 한국 근현대 의학사와 서울대학교병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의학박물관이 개관했다. 2001년 ‘시계탑’ 지붕을 함석에서 원래대로 동판으로 교체했고, 야간 조명도 설치했다. 2007년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행사 때 ‘시계탑’에 바람개비들을 이용한 설치미술이 전시되었다. 2008년 장기간의 노력 끝에 대한의원 현판을 복원하여 설치했다.




대한의원 현판 복원(2008)


2014년 원래의 기계식 시계를 복원하여 ‘시계탑’ 3층에 전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