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역사스케치



의사ㆍ의학생의 8.15 해방 맞이




김상태 교수(의학사연구실)




8.15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그토록 빨리 패망할 줄은 몰랐다. 오죽하면 일장기를 개조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달려 나갔을 정도였다.





해방경축 퍼레이드 모습(1945년 8월)



의사와 의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을 정도였다. 또한 각자 다른 시간, 공간, 위치에서 해방을 맞았다. 어떤 이는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지금의 서울대병원)에서, 어떤 이는 서울 도심의 개인병원에서 해방을 맞았다. 어떤 이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평안도 깊은 산속으로 피신한 상황에서 해방을 맞았다. 어떤 이는 군의관으로 중국 전선에 동원되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들의 회고록에서 해방 당시의 경험담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주근원 1)




1948년 서울의대부속병원 비뇨기과학교실 강사 시절의 모습



1945년 8월 15일,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날 저녁부터 여러 가지 풍문이 들리면서 병원(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안팎으로 긴장감이 감돌았었다. 그날 아침에는 총독부 관저에 밤새 불이 켜져 있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러더니 낮 12시에 일본 국왕의 라디오 방송이 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기대 반, 불안 반. 초조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일본인들 눈치만 보면서 공연히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11시 40분경 슬그머니 수술장을 빠져나와 라디오 있는 곳을 찾다가, 한 연구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숨을 죽이며 일본 국왕의 방송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하도 이상해서, 보통 사람의 화법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잡음도 심했다. 그러나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계탑’(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본관)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때 갓을 쓴 어떤 노인이 시계탑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시계탑의 아래 부분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누군가 노인의 말을 알아듣고는 건물 안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 시계탑 아래 4면의 일장기를 닦아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거기에서 태극 문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본인들이 감춰놓았던 태극 문양을 해방과 동시에 되찾은 것이다. (출처: “함춘원의 회상”)





공병우 2)




1930년대 당시의 모습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중대 방송이 있다는 벽보가 서울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나는 일본의 항복에 관한 것이라고 어림짐작만 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서로들 전화로 확인을 하고서야 일본의 항복이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예측했던 대로 일본 국왕은 잡음이 유난히 많이 섞인 방송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시내는 일본 헌병이 칼을 타고 다녔으니 일본의 패망을 공공연히 기뻐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전단이 하늘에서 떨어진 후부터 우리는 거리로 뛰쳐나가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기세등등하던 일본인들은 풀이 죽어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불안해하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감격적인 순간에, 애국가를 배운 적이 없어 할 수 없이 아리랑을 목 놓아 불렀다. (출처: “나는 새 식대로 살아왔다”)




권이혁 3)




1944년 경성제대 의학부 재학 당시의 모습



1945년 8월 15일, 나는 저녁까지도 해방된 줄을 몰랐다. 숯을 굽는 인부가 배급 양곡 신청서를 가지고 사인장에 갔다가 돌아와서, 평화가 왔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순간 ‘혹시’하고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곧바로 사인장으로 달렸다. 약 20Km 거리였는데 내 딴에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저녁 무렵에 도착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떤 가게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안재홍 선생께서 삼천리강산에 평화가 왔다고 감격 어린 연설을 하시지 않는가?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다음날 새벽 서울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기차가 언제 올 지 알 길이 없었다. 역에서 몇 시간인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기차가 기관차 앞에 태극기를 달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역에는 나 이외에도 몇 사람이 있었는데 다 함께 만세를 불렀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기차에 올랐다. 흥분의 도가니였다. 누가 준비했는지 애국가 가사를 돌렸다. 모두들 애국가를 합창했다. 그러고는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날 밤 늦게 서울역에 도착했다. (출처: “또 하나의 언덕”)




이용각 4)




1945년 군의견습사관으로 중국뤼순육군병원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모습



1945년 8월 15일이 되었다. 그날 아침은 청명한 날씨에 모든 것이 조용했다. 한국, 만주, 중국, 동남아, 태평양을 손아귀에 집어넣은 군국주의 일본이 졸지에 망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장교 식당에 가려고 하는데 비상이 떨어져서 병원의 전 사병이 마당에 모였다. 특별방송이 있다는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방송을 들었다. 누군가가 우는 것 같은 모기 목소리로 말하는데, 그 어조가 일본 국왕이 쓰는 어투였다. 짤막한 성명 속에 연합군, 그리고 무조건 항복이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모두 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내 옆에 있던 일본 군의관 대위 하나가 대성통곡을 하더니 차고 있던 일본도(日本刀)를 빼 들고 자진(自盡)하겠다고 장교 막사로 뛰어갔다. 이제 확실해진 것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이며, 관동군의 항복 대상은 소련군인 것이다.

나는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떨림에 몸과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해방의 기쁨도 옆에 있는 일본 군인들이 우리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무서움과 뒤범벅이 되었다.

항복 방송이 있은 후 육군병원의 분위기는 파장이었다. 자진하겠다고 자기 방으로 돌아간 일본 군의관도 싱거운 얼굴로 다시 나와 돌아다녀 동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날 오후 늦게 부대장이 나와 또 한 분의 한국인 군의관을 불러, “이제 당신들은 일본군 소속이 아니니까 부대를 떠나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을 허가한다. 동시에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모든 한국인 환자들을 데리고 떠나기 바란다. 필요한 편의는 봐주겠다.”라고 말했다. 만주 화폐도 넉넉히 주었다. 지금은 이북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군의관과 나는 병원에 입원 중인 모든 한국인 환자와 일반 사병들을 집합시켰다. 모두 60여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많은 한국 출신 군인이 있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신과 환자도 있었는데 다들 하루아침에 멀쩡한 정상인으로 되돌아왔다. (출처: “갑자생 의사”)





1) 주근원 (1918~2011)은 1943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8.15 해방 당시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의 외과의사로 근무했다. 해방 후 비뇨기과로 전공을 바꾼 후, 서울의대부속병원 비뇨기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환자 진료 및 비뇨기과학 교육에 힘썼다. 서울대병원 부원장을 역임하며 병원행정에도 기여했다.


2) 공병우 (1906~1995)는 1938년 서울에 안과 전문병원인 공안과의원을 개원하고 환자 진료에 힘쓰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경성의학전문학교 안과학교실 교수를 역임했다. 그 후 한글타자기 개발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3) 권이혁 (1923년 출생)은 경성제대 의학부 재학 중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했다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평남 순천군 사인장이라는 곳에 은신해 있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1947년 서울의대를 제1회로 졸업했다. 그 후 서울의대 학장, 서울대병원장, 서울대 총장, 문교부장관, 보건복지부장관, 환경처 장관,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다.


4) 이용각 (1924~2016)은 1945년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재학 당시 군의견습사관으로 동원되어 중국 뤼순육군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그 후 가톨릭의대 외과학교실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9년, 국내 최초로 신장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1989년 초대 인하대 의무부총장 겸 인하중앙의료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