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역사스케치



일제강점기 의학도와 축구




김상태 교수(의학사연구실)




* 일제강점기 청년들이 권투를 좋아한 까닭은...


 대한제국시기 독립협회의 지도자였고, 일제강점기 개신교계의 원로였던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1883년부터 60여 년 동안 일기를 썼다. 그것도 1889년부터는 영문(英文)으로 썼는데, 그의 일기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보편적인 감정을 알고 싶으면, 어느 종목이든 일본팀과 외국팀 간에 운동경기가 벌어지는 곳에 가서 조선인 관중의 태도를 지켜봐라! 작년에 경성운동장에서 필리핀 선수와 일본 선수 간에 권투경기가 열렸다. 조선인들은 필리핀 선수가 일본 선수에게 유효타를 날릴 때마다 열렬히 환호했다. 조선 청년들이 권투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조선인이 일본인을 원 없이 두들겨 패고도 경찰서에 끌려가지 않기 때문이란다. 난 이런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과 상관없는 엄연한 현실이다.”(윤치호의 1934년 9월 25일자 일기)

윤치호의 일기 내용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한국인 청년들이 권투를 좋아했는데 그 까닭은 “일본인을 원 없이 두들겨 패고도 경찰서에 끌려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경성의학전문학교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한국인 의학도들이 가장 좋아했던 스포츠는 무엇이었을까?




* 일제강점기 한국인 의학도에게 축구란...



경성의학전문학교 축구부(1927)




경성의학전문학교 축구부(1940)



첫 번째 사진은 제2회 전문학교축구연맹대회에 출전한 어느 축구팀의 모습이다. 유니폼에 선명하게 새겨진 ‘M(medical)'자를 보니 경성의학전문학교 축구부다. 뒷줄 가운데 축구부 부장인 박창훈 외과 조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앞줄 왼쪽 끝은 훗날 서울의대, 부산의대, 가톨릭의대 등에서 해부학자로, 학장으로 이름을 떨친 정일천이다.

두 번째 사진도 경성의학전문학교 축구부 학생들 모습이다. 학교 안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가운데 교복을 입은 학생은 축구부 주장 윤덕선이다. 그는 훗날 외과의사로 성장해 성모병원 외과의 기초를 다진 후 성심병원과 한림대학교를 세웠다.

1941년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한 권이혁의 회고에 따르면, 경성제대 예과에는 운동부가 많았는데 한국인 학생은 축구부에 가입하는 것이 상례였다. 축구부는 100% 한국인 학생으로 구성되었고, 일본인 학생은 축구부에 들어갈 생각도 못했다.

그렇다면, 한국인 의학도에게 축구는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경성제대의 한 학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축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축구가 우리 조선의 국기(國技)라고까지 생각할 인연 깊은 특수한 운동인 만큼 오직 축구만은 성대(城大, 경성제대의 약칭)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이 주재하여 유지하여 나가게 되어 있다. 이 축구가 우리에게 유일한 위안과 용기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사경욱(경성제대 축구부) - ‘만주 축구 원정기 (1)’, 동아일보 1929년 10월 21일자)

한국인 학생들에게 축구는 한마디로 “조선의 국기로서, 유일한 위안과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즉 식민지 백성으로서 겪는 정치적 억압, 경제적 수탈, 사회적 차별, 문화적 소외와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이 주도권을 쥔 학교에서 겪는 냉대와 설움을 오로지 실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제가 축구였던 것이다.




* 축구부는 민족의식을 키우는 배움터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관립학교로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다녔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처음에는 한국인 학생 수가 많았지만, 어느 틈엔가 역전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학생들이 훨씬 많아졌다. 경성제대 의학부는 처음부터 일본인 학생들이 다수였고, 한국인 학생들은 평균 27% 정도에 불과했다. 두 학교 모두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은 물과 기름 같았다. 한국인 학생들로서는 나라 잃은 설움과 일제의 억압, 수탈, 차별에 늘 분하고 억울했다. 게다가 매일같이 학교에서 식민사관 등 일본인 위주의 교육을 받았고, 일본인 교수들과 학생들의 차별과 냉대를 겪었다. 1941년에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한 임광세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준다.

“1941년에 입학했는데, 80명 정원에 한국인 1/3, 일본인 2/3였다. 물에 뜬 기름과 같이 서로 어울리지 못한 일본 학생과의 공학은 그때까지 순진하기만 했던 나로 하여금 민족의식에 눈뜨게 해 주었다. 농구부와 축구부는 한국 학생이 독점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배일사상과 연계될 수밖에 없었다. 일부 한국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본 학생들의 나막신(下駄)에 대항해서 고무신을 신고 다니기도 했다. 경성제대 학생이라면 친일파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임광세 – ‘의학 반세기의 회고’ (서울대학교 병원보, 1989년 7월)

그래서 두 학교의 동아리만 봐도 검도부, 유도부는 일본인 학생 일색이었고, 축구부는 100% 한국인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축구부에 들지 않은 한국인 학생들도 축구부 일이라면 으레 한국인 학생 전체의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축구부는 한국인 학생회와 같았다. 축구부는 한국인 학생들이 응집력과 민족의식을 키우는 배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