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역사스케치



서울의대 교수진, 미네소타에 가다




김상태 교수(의학사연구실)




전주MBC는 1년여에 걸쳐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2017년 5월에 방영했다. 한 달 후 이 다큐멘터리는 전국의 MBC 계열사들을 통해 시청자들의 안방을 찾았다.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미네소타 프로젝트 2017’이었다.




( 미네소타 프로젝트 2017 영상 )



그런데 다큐멘터리의 제목이자 핵심 내용이었던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서울의대와 서울대병원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가난과 독재,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우리나라가 총체적 난국에 처했던 1950년대 중후반, 서울의대와 부속병원도 교육, 연구, 진료보다도 전후 복구에 전념해야 했던 그 시절에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전개된 것이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란 1954년 9월부터 1961년(행정대학원은 1962년)까지 총 6년 8개월 동안 미국 정부가 서울대학교에 시행한 교육원조 사업을 말한다. 이 사업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제3세계 국가들에 지원한 교육원조 사업 중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대규모였으며, 그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특히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은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교육, 연구, 진료 등 모든 면에서 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의 협정 체결
(가운데 최규남 총장, 오른쪽은 프리먼 미네소타 주지사, 1954년 9월 5일)




시설을 복구하다



1954~196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의 건물 보수 및 시설 확충을 위해 695,200달러가 투입되었다. 기관별로 보면 의대 건물에 14,700달러, 부속병원에 525,700달러, 간호학과에 154,800달러가 투입되었다.

의대에서는 기초교실 건물의 지붕을 개수하고 수도 및 전기시설을 보수했다. 동물실, 항온실, 강당과 복도 등도 보수했다. 특히 기초의학 건물 3층 옥상에 도서관을 증축하고, 1955년 이후 매월 60여 종의 의학잡지를 지원받았다.

병원에서는 일부 병동의 증축, 병원의 난방, 수도 및 전기설비 보수, 도로 포장 등을 했다. 특히 1959년 수술장 건물과 방사선과를 증축하고, 1961년 미국에서 도입한 취사 및 세탁시설을 설치했다. 1958년과 1959년에는 간호학과 건물과 간호원 기숙사를 각각 신축했다. 아울러 1959년 간호고등기술학교가 의과대학 간호학과로 승격되었다.

의대와 부속병원의 교육연구 및 진료용 기기 도입을 위해 약 614,500달러가 투입되었다. 기초의학 부문에 231,600달러, 임상의학 부문에 381,600달러가 배정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최신식 기기들을 도입하여 의대의 교육 및 연구시설을 대폭 보강했고, 부속병원의 진료시설들을 현대화했다.




미국인 자문관들의 도움을 받다




간호고문 줄리언이 작성한 간호업무 및 간호교육에 관한 최종 보고서(1961년)



미네소타 프로젝트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에는 의과 부문 7명, 간호 부문 3명, 병원행정 부문 1명 등 총 11명의 자문관이 파견되었다. 총괄자문관 멀로니(Maloney), 매츄(Matthews, 마취과학), 쉬머트(Schimert, 외과학), 골트(Gault, 내과학), 의과부문 자문관 플링크(Flink, 내과학), 브라운(Brown, 생리학), 버그런트(Berglund, 소아과학), 간호부문 자문관 로우(Low), 윌리엄스(Williams), 줄리언(Julian), 병원행정 자문관 미첼(Mitchell)이었다.
자문관들은 강의 및 진료, 회의 참석, 권고안 제시, 기술 지도, 개별 자문 및 상담 등의 자문활동을 벌였다. 의대의 강의방식, 강의 관행, 강의 절차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현장에서의 임상교육을 강조했다. 미국식 교육방법과 강의방식이 유용하다는 것을 확인시키고자 서울의대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여러 시술을 시범 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매주 학장 및 병원장과의 연석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병원행정 전반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네소타대학에 연수를 가다


1955년 9월 서울의대 교수진 제1진 12명이 미국으로 출발했다. 당시 서울의대부속병원장이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였던 진병호, 감염내과의 선구자 전종휘, 조교수이던 서병설(기생충학), 홍창의(소아과), 백만기(이비인후과) 등이었다. 그리고 대학원생인 이상돈(생리학), 이호왕(미생물학)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포비행장이 없었던 시절, 그들은 여의도비행장에서 Northwest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서병설 교수(기생충학)의 미네소타대학 연수시절(1956년)




미니애폴리스에 위치한 미네소타대학은 1851년에 설립되었다. 1950년대에는 학생 수가 2만 여명에 달했으며, 미국 내에서 10대 주립대학에 포함되는 종합대학이었다. 미네소타 의대는 역사, 시설, 교수진의 학문적 권위 면에서 당시 미국에서도 유수한 의대 중 하나였다. 특히 심장학과 심장수술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최고 권위를 자랑했다.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도 본래 미네소타 의대와 결연을 맺고 미네소타대학 대학원 분교로서 학사행정을 합동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미네소타 의대 부속병원의 규모는 700여 병상이었고, 시립병원, 보훈병원, 기독교병원 등과 교육병원으로서 결연을 맺고 있어서 학생교육과 인턴, 레지던트 수련을 용이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전종휘는 당시 미네소타 의과대학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5년 나는 미네소타대학 의대 연수 제1진에 뽑혀 미국에 갔다. 임상 각 과는 진료시간에 앞서 아침 일찍 학술모임을 갖는 데 퍽 놀랐다. 내과 학술모임의 경우 내과 임상증례 토의(MGR)나 임상병리 컨퍼런스(CPC) 시간에 의대 상급반 학생, 대학원생, 레지던트, 교직원은 물론 많은 개원의들이 큰 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활발히 질문도 하고 토론을 벌여 활기가 넘쳤다.”

서울의대 교수진의 연수, 유학은 1961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를 교환교수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꽃이라 할 수 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 기간 동안 의대에서는 총 77명이 연수에 참여했다. 의대 교수요원이 62명, 간호사 9명(간호학과 교수요원 5명, 병원 소속 4명), 보건대학원 4명, 병원 행정직 2명 등이었다.




미네소타대학병원 수술장에서 개심술 마취중인 이화영 선생님(1960년)



교환교수 프로그램은 크게 보아 단기과정과 학위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단기과정은 3개월부터 1년 이하의 기간 동안 주로 시찰 및 상담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시니어급(부교수 이상) 교수들이 이에 해당되었다. 조교수 이하 주니어급 교수요원들은 모두 학위과정을 이수하도록 유도했다. 즉 2년 이상 머물도록 한 것이다. 전체 77명 중 33명이 신진 연구자들이었다. 당시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대학원 조교들을 비롯해 젊은 교수들에게 큰 비중을 두었다는 점에서, 단기적 성과보다는 미래의 교수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기본 취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961년까지 3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기녕(생화학), 김재남(해부학), 이호왕(미생물학)이었다. 이상돈(생리학), 임정규(약리학), 심보성(신경외과학) 등 8명은 석사학위를 받았다. 김주완(방사선학)은 미국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총체적 도약을 이루다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 다녀온 교수들을 통해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에 현대의학의 새로운 동향이 급속이 소개되었고, 미국식 의학교육이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과거 일본식의 이론식 의학교육 방식을 벗어나 보다 창의적으로 실용적인 임상 중심, 실험 중심의 미국식 의학교육방식으로 대체되어 갔다.

이 시기 동안 강의 위주의 의학교육은 시청각 교재를 이용한 증례 위주의 토론방식으로 바뀌어갔고, 임상교육도 베드사이드 교육 등의 실전 훈련이 보편화되어 보다 풍부한 교육 수련이 시도되었다. 1957년 학생실습제도, 1958년 인턴제도, 1959년 레지던트제도가 정착되어감으로써 제도적으로도 현재의 수련의제도의 원형이 창출되었다.

임상과목들도 재정립되었다. 외과의 경우 일반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로 분화되었고, 마취과가 분리 독립되었다. 임상병리과도 신설되었다.

1950년대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는 이후 1960년대, 1970년대 한국 의학계를 이끌어 갈 새로운 인력을 키워낸 데 있다. 현대의학의 최신 견해와 새로운 교육방법론으로 훈련된 신진 교수들과 열의에 넘친 학생들은 열정을 가지고 교육과 연구에 전념했다. 이들을 통해 미국식 의학교육과 신진 의학기술이 다른 의과대학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의학교육과 의학연구의 원형을 창출한 프로그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