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마당]

학생기고 - 새로운 시작과 이별이 공존하는 공간: 연건 기숙사의 이삿날

 
정한별 학생(본과 2학년)

 

산더미 같은 이삿짐 종이 상자, 짐 정리로 분주한 학생들과 지원군으로 나선 가족들. 연건사와 국제관 등 연건 캠퍼스의 기숙사가 바야흐로 연례 행사를 맞아 활력이 넘친다. 매년 이맘때면 새로이 사생을 선발하여 입주 절차를 실시하는 까닭이다. 그 중 캠퍼스 내에 자리한 연건사는 의과대학 및 치과대학의 학생들을 동시에 수용하는 커다란 규모의 기숙사로, 총 220여 실의 학부 생활관과 60여 실의 대학원 생활관 그리고 20여 세대의 가족 생활관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삿날의 소란스러움이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들며 나며 짐을 옮기는 사생들의 낑낑거림과 그들을 따라다니며 살뜰히 보태는 가족들의 잔소리로 온 건물이 시끌벅적하다. 이처럼 많은 이들로 연건사 전체가 들썩이는 중에도 본과 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며 기숙사에 입주하는 학생이 누구인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의 눈은 설레임과 희망으로 유독 빛났기 때문이다.

“새로 입주하게 되어서 기뻐요. 그것도 국제관이라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주변 이곳 저곳을 조금씩 탐방하며 혜화라는 동네와 더 친숙해지고 싶어요.”(정성현 학생, 의학과 신입생)


연건사 이삿날의 풍경. 좌: 각종 이삿짐으로 빼곡한 연건사의 복도. 우: 입주 절차를 위해 마련된 1층 로비의 각종 서류들.

입주 허가를 받아 방에 짐을 들이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모든 사생은 우선 1층 로비 한가운데에 비치되어 있는 입주 원서와 서약서를 작성했다. 그 후 각 방의 비품 상태를 점검한 뒤 로비로 돌아와 층별로 구별된 탁자에 건강 증명서 등 각종 서류를 제출하는 걸로 행정적인 절차는 일단 완료했다. 대부분은 성공적으로 입주 허가를 받았지만, 몇몇 사생은 예방 접종 이력 등이 담긴 건강 증명서를 미처 준비하지 못해 울상을 짓기도 했다. 이미 연건사에 거주 중이던 학생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매년 새롭게 방을 재추첨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머물던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퇴거 절차를 밟은 뒤에야 비로소 새 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같은 층의 방으로 옮기는 행운을 얻은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연건사의 여건상 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신체적 장애가 있는 경우 연건사의 거주 환경에 매우 큰 장벽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두가 설렘으로 분주한 것은 아니었다. 둥지를 트는 이가 있다면 떠나는 이들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졸업과 함께 기숙사를 영영 떠나는 이들의 마음은 애틋한 듯 보였다. 

“섭섭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해요. 1년 동안을 연건사에서, 그리고 나머지 3년을 국제관에서 보냈으니 본과 생활 내내 기숙사에 있었던 셈이네요. 정들었던 기숙사를 떠나자니 서운하지만, 복잡한 기숙사 신청 과정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기도 해요. 모순적인 장소예요. 그러고 보니 불면과 숙면이 공존하기도 했네요. 시험기간에는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 와중에 쪽잠으로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울 수 있었던 공간이기도 하거든요.”

이제는 학생 신분이 아니라 한 명의 의사로 병원에서 일하게 될 김재현 학생이 만감이 교차되는 듯 한 마디를 더 남겼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저 기숙사 방이 당직실로 바뀔 뿐이잖아요(웃음). 학생 신분으로 누렸던 기숙사 생활이 영원히 그리울 거예요.”

학생기고 - 함춘인사이드 학생 기자로서의 임기를 마치며

한희원 학생(본과 2학년)

 

처음에 함춘인사이드의 기자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들었을 때에는 걱정부터 앞섰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글을 기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망설였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친구의 제의를 받아들였었다. 일년 동안 학생기자로서의 활동을 마친 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동안 내가 썼던 여러 기사들을 생각해보니 많은 추억이 떠오른다. 기사의 소재를 무엇으로 해야 할 지 몰라 끙끙 앓던 순간부터 동기들에게 기사를 부탁해야 했던 미안함과 어려움, 기사를 위해 직접 행사에 참여하여 취재하던 일들까지. 일년 동안 함춘인사이드를 통해서 아주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글을 쓰는 것이, 또 글을 쓰기 위해 취재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오히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조금은 다채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함춘인사이드를 위해 글을 쓸 수 없다는 게, 편집회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다. 워낙 부끄럼이 많아 편집회의에서 제대로 된 코멘트 한 번 하지 못했지만 교수님들께서 함춘인사이드를 더 좋은 매체로 만들기 위해서 힘쓰시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교수님들께서 이렇게 열심히 힘써주시는 만큼 함춘인사이드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년 동안 함춘인사이드의 학생기자로 활동할 수 있어서 너무 즐거웠다. 앞으로는 학생기자로서가 아니라 열렬한 구독자로 매달 함춘인사이드를 열심히 찾아보아야겠다. 일년 동안 학생 기자로 활동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신 정유린 선생님과 여러 교수님들께 감사 드린다. 

학생기고 - 1년의 발자국을 돌아보다

최수연 (의예과 1학년)

 

지난 해를 돌아보건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 1년은 아니다. 그렇다고 늘 같은 일상으로 지루했던 1년도 아니다. 마치 강물 위의 나뭇잎처럼,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렸던 그런 시간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예과 2학년 선배들이 본과 OT를 가고, 후배들이 대학 합격 연락을 보내올 때쯤, 나의 대학 생활1학년이 지나갔음을 느꼈다. 아침마다 교복을 입고 똑 같은 시간표로 매일을 보내던 고등학교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입시가 가장 중요했던 지난 날, 나에게 매해 1년은 그저 새로울 것 없는, 지난 해와 같이 연속된 시험의 반복에 불과했었다. 그 시험을 위해 때로는 인간관계를, 때로는 여가 시간을,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그 해의 시험이 끝나면 다음 해의 시험을 준비하면서 1년을 보냈다. 대부분의 학생들도 나와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많은 시간들이 시험이라는 목적 아래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못했었다. 그렇게 입시, 내신이라는 눈 앞의 허들만 바라보며 12번의 1년을 보내니 어느새 대학에 와 있었다. 그런데 대학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몇 가지의 필수 이수 규정만 있을 뿐, 이 곳에 들어오기 위해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시험 성적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었다. 그 어떤 허들도 없다는 점이 오히려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는 불안으로 다가와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인생의 가치를 무엇에 두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이젠 더 이상 넘어야 할 허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답을 생각했을 때, 흑백으로 멈춰 있던 지난 날의 나의 시간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지난 1년은 잔잔하게 소용돌이치며 흘렀다. 

앞으로 2년 동안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수도 있고,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매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무언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무조건 시도했었다. 고등학교 때 제일 못했던 과목인 음악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저 연주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연주회에도 섰고 지금은 악장까지 맡아 활동하고 있다. 술을 좀더 맛있게 먹고 싶다는 생각에 여름방학 두 달 동안 일주일에 두세 번씩 서울역의 칵테일 학원에 다니면서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서 하는 특강들을 무작정 신청했고, 뮤지컬에 빠져 동기들, 선배들과 싸게 표를 구하거나 VIP석을 지르기도 했다. 이런 과감한 결정들이 때로는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사진1. 2018년 11월 17일 클래식 기타 연주회 사진

공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어, 수학 등 필수 과목을 공부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이 학문들이 미래의 나에게 어떤 중요성이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 해야만 한다니 그저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학은 나에게 수백 개의 강의를 제시하면서도, 학점은 평균 2.0 이상만 넘으면 된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주었다. 나는 성적을 잘 주거나 쉬운 과목들을 거부하고 나의 생각, 가치관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인생 강의’를 듣고 싶었다. 그 결과, 어쩌다 보니 인공지능의 위협으로부터 인간만의 가치, 아름다움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 철학과 미학만 1년동안 18학점을 수강했다. 물론 의예과 필수 이수 규정에 포함된 듣기 싫었던 과목들도 많았다. 수업을 안 듣고 잔 적도 있고, 하루 종일 자체적으로 휴강을 해서 언니와 야구장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이런 일탈이 재미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의무를 지킬 때 마음이 편하고 더 즐겁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자유가 매번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작년 3월, 본과의 한 선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누구를 만날지 말지도 모두 너의 선택이다.” 대학에 와서 제일 낯설게 느꼈던 감정은 허전함이었다. 좋든 싫든 하루 종일 마주칠 반 친구가 있었던 중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에서는 같은 과로 묶여 있어도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많았다. 집에 같이 가거나 밥을 먹을 친구가 없을 때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은 사람, 흔히 말하는 아싸(아웃사이더) 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도 다가온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다. 그 중 클래식 기타 동아리 아르페지오를 빼놓고는 작년 한 해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부원들과 함께 MT를 가고, 연주회를 준비하고, 웃고 떠들었던 시간이 나의 1년을 빼곡히 채워 놓았다. 학기 초 어색한 분위기에서도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 동기들, 부족한 나를 격려하고 끝까지 이끌어주던 선배들, 참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또 생활 지도 멘토링을 하면서 만난 3명의 동기들, 그리고 지도 교수님이신 김학재 교수님과 정기적으로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따듯한 시간을 보냈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나의 근황을 알리며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게 많은 의지가 되었다. 


사진2. 2019년 1월 2일 아르페지오 동아리 MT 사진.

대학에 오기 전, 날이 좋은 날 고개만 들면 보였을 파란 하늘, 늦은 밤의 여유로움과 고요함, 이들이 이렇게 예쁜 것인 줄 몰랐다. 여행도, 콘서트를 갔던 일도, 고등학교 때의 나라면 상상도 못했을 순간 순간들이었다. 물론 행복하고 가치 있었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외, 알바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돈에 집착하게 되어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서 차츰 벗어나다 보니,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어느새 소문이 퍼져 있었다. “최수연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면서 즐겁게 사는 것 같더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즐겁지 않았던 시간들을 찾기 힘들다는 것도 맞다. 내년이면 이런 생활도 끝이 나고 진짜 의사의 길을 걸어야겠지만, 아직 의대에 왔다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인 것 같다. 바로 내게 주어진 기회들을 충실하게 활용하면서 나의 시간을 다양한 색깔로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2학년이 된 올해,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예과 친구들도 잊지 못할 시간으로 채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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