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마당]

『맡겨진 소녀』를 읽고

이동하 학생(의학과 박사과정)

도서. 맡겨진 소녀

『맡겨진 소녀』를 읽고 난 뒤,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시골 풍경이 제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짧은 분량 안에 담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곳곳에는 결핍과 보살핌, 상실과 발견의 다채로운 결이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클레어 키건 작가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세밀한 문체 덕분에, 저는 소녀의 발자국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그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습니다.

소녀가 부모님과 나누던 평범한 오후의 티타임 장면은, “며칠만 이모 집에서 지내 볼래?”라는 한마디로 완전히 다른 경험으로 전환됩니다. 그 문장 자체는 간단하지만, 숨겨진 부모님의 무거운 마음이 아이의 가슴에 작은 불안의 씨앗을 심어 놓습니다. 그동안 부모님 품에서 느껴 보지 못했던 불안과 그리움이 마치 파도가 일렁이듯 소녀를 흔들어 놓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어른이 감추고자 했던 속마음이 때로는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이어진 여정은, 소녀에게 있어 낯설고도 설레는 첫걸음이자 동시에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도시의 소음과 인파가 사라진 플랫폼에 서서, 콘크리트 대신 흙바닥이 깔린 역 구내를 바라보았을 소녀의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그곳에는 기계음 대신 풀 베는 소리와 멀리서 우는 새소리가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저는 독자로서, 소녀가 느꼈을 뻔한 심리적 공허와 동시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이모 수전과 삼촌 셰인이 소녀를 맞이하던 장면은 따뜻함 그 자체였습니다. 수전 이모는 조용히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천인형을 꺼내 건네며 “밤에 외롭고 무서울 때 안아 봐”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투에는 세심한 배려와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고, 도시에서는 결코 느끼기 어려운 온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손길 하나가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큰 위안을 줄 수 있는지를 실감했습니다. 삼촌은 말이 적었지만, 묵묵히 두 손으로 사과 한 조각을 깎아 내밀었습니다. 그 소박한 손짓에 담긴 정성은 소녀에게 “여기가 당신을 환영하는 곳”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시작된 농장일은 소녀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른 새벽, 이슬 맺힌 풀밭을 가로지르며 이모와 함께 밭을 살피는 경험은 도시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서늘한 이슬, 부드럽게 부서지는 흙의 촉감, 그리고 공기 중에 떠도는 짚 냄새는 소녀의 오감을 일깨웠습니다. 옥수수 사이로 손을 뻗어 잡초를 뽑을 때면, 이모와 나누는 조용한 대화가 소녀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 주었습니다. “오늘은 아침 공기가 어때 보이니?”라는 이모의 물음에, 소녀는 스스로의 감각을 언어로 표현해 보며 자신도 모르게 성장하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일요일이 되면 교회당으로 이어진 좁은 시골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낮게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가 마을 전체를 감싸고, 소녀는 그 울림 속에서 타인과 함께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맛보았습니다. 어르신들이 건네는 손수 만든 빵 한 조각,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이웃 아이의 시선은 소녀에게 또 다른 형태의 가족애를 선물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돌봄의 공동체가 어떻게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뚜렷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폭풍우가 몰아쳤던 그 밤입니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는 소리, 빗방울이 처마를 때리는 소리는 마치 대자연이 만든 음악 같았습니다. 소녀는 이모의 팔에 꼭 안겨 촛불이 깜빡이는 좁은 방 안에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모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지켜 줄게”라는 말은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언어보다 소중했습니다. 저는 소녀가 비로소 ‘안전함’을 느꼈을 그 순간을 상상하며, 보호받는다는 감각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안정을 주는지 깨달았습니다.

짧게 지나간 시간 동안 소녀는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했습니다. 혈연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실제로 나의 삶을 보살펴 주는 존재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는 문득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혈연보다 더 깊은 유대감을 나눈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의 작은 친절한 말 한마디, 함께 나눈 조용한 시간 한 토막이 제게도 그토록 큰 위안을 주었음을 되새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소녀를 데리러 온 날, 소녀의 표정은 이전과 사뭇 달랐습니다. 차분하고 성숙해진 눈빛으로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녀는 작게 미소 지었습니다. 시골집에서 얻은 위로와 안정감이 소녀 내면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기차에 올라탄 뒤에도 손에 꼭 쥔 천인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따뜻함을 전해주고 싶다.” 저는 그 다짐이 제 가슴속에도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누군가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분량은 짧지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결핍과 보살핌의 본질을 섬세하게 그려 냅니다. 과장된 수식 없이 일상의 순간을 차분히 포착하는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스며들게 하고 그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은 ‘맡겨짐의 위안’을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작은 선의 가치를 일깨워 주며, 삶의 여정에서 잠시 멈춰 서서 누군가의 손을 잡아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용히 속삭입니다. 그렇게, 저는 이 소설을 덮고 난 뒤에도 여운에 잠긴 채로, 더 자주 누군가에게 다정한 시선을 건네기로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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