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수님들의 건의사항/의견은 아래 메일을 통하여 비전추진단에서 수렴하고 있습니다.
임상교수는 서울의대의 가장 중요한 비전입니다.
서울의대의 가장 중요한 비전은 후속 세대이고, 서울의대 후속 세대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임상교수님들이십니다. 김정은 학장님 이하 현 학장단에서는 비전추진단을 통해, 병원 임상교수와의 소통을 증진시키고 대학에서의 역할을 확대하고자 합니다. 비전추진단은 카카오톡 채널 [新서임당: 새로운 서울의대-임상교수 소통마당]을 개설하여 의과대학에서의 소식을 임상교수님들께 전달하고, snuh@snu.ac.kr 메일 계정을 통해 임상교수님들의 건의와 질문을 받을 계획입니다. 임상교수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서울의대는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제언 부탁드립니다.
비전추진단 올림작년 총선 전 발표된 의과대학 정원 확대 정책으로 시작된 의료 대란이 네 계절을 지나고 있다. 1월 1일 당직을 위해 출근하는 새벽 지하철 안에서 나는 작년에 무엇을 했나 떠올려 보았는데 당직과 근무, 다시 당직으로 이어지는 피로한 나날과 그 사이에 별처럼 박힌 휴가 외에는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한 해를 넘기고도 의료 대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마당에 올해를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유달리 즐거웠던 휴가에서 느낀 것은 놀면서 돈 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새롭고 짜릿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행복해지기에 임상교수요원은 놀 시간도 많지 않고, (슬프게도) 돈도 많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임상교수요원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절망하며 내 마음처럼 흔들리는 지하철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심사숙고한 결과 행복의 길은 아무래도 덕질에 있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흔이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고 했는데, 더는 뽑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새치를 빼고 가장 달라진 것은 일상에서 재미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좋아하던 음악도 익숙해져 어제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해도 시큰둥하다.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도 어디서 들어본 내용으로 그저 배우만 바뀔 뿐인데, 배우마저도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 어딜 가서 맛있다는 음식을 먹어도 대충 아는 맛이고 병원 식당 음식도 먹을 만 해서 7년이나 근무한 병원 근처에 아는 식당이 없다. 미혹되지 않고 일상이 평온한 것은 좋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역으로 일상에 미혹이 없다고 하여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 위안 삼을 일은 아니다. 그보다도, 세상에 딱히 놀랄 일도 새로운 일도 없는 것이 삶이 좀 밋밋한 느낌이다. 이렇게 살다 보니 엊그제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은 어제가 그제와 같고, 오늘이 또 같았기 때문에 기억할 필요가 없다. 복붙한 날들은 엔트로피의 증가와 함께 소멸해 버리고 시간은 잘못 쏜 화살처럼 허공으로 사라져, 나의 2024년은 있었는데 없는 시간이 되었고, 은행과 카드사가 모두 가져간 당직비의 흔적으로만 통장에 남았다. 그래서인지 불혹의 시간은 유달리 빨리 가는 느낌이 드는데, 이런 것을 ‘시간 단축 효과’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왜 시간이 빨리 가는가에 대한 문제는 고금의 화두이다. 과학계에서 시간 단축 효과의 발생은 도파민의 감소로 인한 생체시계의 변화, 기억 능력의 감소 등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됐는데, 최근에 이미지 처리 속도의 둔화가 원인이라는 흥미로운 설명을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신경계의 복잡화로 인해 이미지를 처리하는 경로가 길어지고, 이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이미지의 수가 감소한다고 한다(한겨레신문, 2024년 6월 29일,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가 추가됐다). 뇌가 처리해 인식하는 이미지의 양이 감소하면서 우리는 좀 더 촘촘히 인지하던 시간을 더 성기게 인지하게 되고, 이에 따라 마음 시계와 실제 시간이 괴리되면서 마치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단축 효과는 단지 생물학적 저주일 뿐인가. 모두에게 물리적 시간이 공평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내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짊어질 문제이며, 마음 시계의 태엽을 감기 위한 노력도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처리되는 이미지가 적다면 더 새롭고 강렬한 이미지를 제공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성긴 이미지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서는 일상에 계속 새로운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적절히 도파민을 제공하는 일이 필요하다. 대학에 이르기를 ‘진실로 날로 새로워지려거든, 나날이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라고 했다(김원중 역, 대학, 중용, 휴머니스트, 2020). 새로워지려거든 새로워지라. 어떻게 보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동어반복적 명제처럼 들리지만 진정 오늘이 어제와 다르기 위해서는 새로워지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덕질’이다. 덕질의 어원인 오타쿠라는 말에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히키코모리 같은 서브컬처의 부정적인 의미가 씌워져 있지만 원래는 특정한 것에 강하게 몰두하고 집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좋게 해석하면 장인의 정신으로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파생한 덕질이라는 단어는 좁게는 아이브 같은 특정한 연예인을 추앙하는 활동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특정한 취미나 대상에 일반적인 정도보다 강하게 빠져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오늘 러닝하는 날이지만 회식이니 못 하겠네, 라고 하면 그냥 취미생활이지만, 오늘 뛰어야 하는 날인데 회식이 있으니, 일차만 끝나고 바로 보라매 공원으로 가야지 하면서 운동복과 운동화를 챙겨서 출근하면 덕질이라고 할 수 있다. 덕질이 행복과 무슨 상관인가.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면 인력이 발생한다. 단순히 삶의 일부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그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게 된다. 건강하기 위해서 러닝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취미가 덕질로 넘어가는 순간 나는 러닝을 위해 건강하게 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근 감소를 막기 위한 근육운동을 하고 좋은 음식으로 식단을 구성하며 회복을 위해 충분한 수면을 취하려 노력한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덕질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향상과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은 고통보다는 기쁨을 주고 극단에 이르면 고통조차도 기쁨이 된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즐기고 싶은, 소위 ‘덕력’이라고 하는 힘이 생긴다. 이 힘으로 인해 사람이건 취미건 진정 사랑하는 대상이 생겼을 때 어제는 오늘과 달라지고 하루하루가 특별해진다. 횡단보도 앞에서 골프 스윙 연습을 하는 분들을 보면 하나같이 표정이 밝다. 주변에선 저 사람 왜 저러지, 라고 생각할지라도 그분들은 세상이 골프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내일, 초록빛 필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참으로 행복하다. 아마 그들은 우리 집 어린이처럼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덕질을 해야 할까. 덕질의 최고봉은 취미와 업이 같은 덕업일치다. 그렇게 생각할 때 임상교수요원으로서 덕질 중 상덕질은 연구덕질이다. 그런 게 가능한가 싶은데, 돌이켜 보면 교수님 중에는 그런 분들이 많다. 숨 쉬는 것처럼 연구를 생각하며 매일 새로운 연구 주제를 말씀하시며 (어제 쓴 것 말고 새로운)연구계획서를 쓰라고 제안하시기도 하고, 전공의들을 앉혀 놓고 새로운 장비의 작동 원리나 그와 연관된 연구 트렌드에 대해 신나게 말씀하시기도 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눈빛이 얼마나 초롱초롱한지 이런 분들이 교수님이 되는구나 싶다. 하지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연구의 길은 험난해서 연구를 좋아하자면 우선 좋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동의서를 받는 것도 좋아해야 하고(십 분 설명했는데 거절당하는 것도 즐겨야 한다), 이역만리의 언어로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해야 한다. 차라리 투고한 논문이 통과된 것도 리젝된 것도 아닌 슈뢰딩거의 논문 상태일 때는 마음이 편하지만, 이런저런 코멘트가 붙은 메일이 오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승냥이 같은 리뷰어들이 내 논문을 산 채로 뜯으며 ‘이 문제는 어떻게 할 거야 저 문제는 어쩔 거야!’ 라고 지적할 때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오는 양 이 연구는 망했나 봐, 이제는 직장을 옮겨야 하나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연구덕질을 하자면 이런 것도 즐겨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연구 따위 정말 못 할 짓인가 싶지만 때때로 ‘정말 좋은 연구야!, 너 정말 열심히 했구나’ 라거나 ‘난 이 부분이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이렇게 조금 바꿔보면 어떨까?’라며 따뜻하게 조언해 주는 고명하고 인자하신 리뷰어 선생님들을 만나면 그간의 상처가 씻겨 나가는 기쁨을 느끼며 acknowledgement의 마지막에 산세리프 이탤릭체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논문을 리뷰어 #3 님에게 헌정합니다.’라고 수줍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구는 의미 있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이기에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배우거나 들은 대로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 아니하고 지식의 틈을 찾아 새로움을 채워 넣는, 진정으로 나날이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새해 첫날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올해 삶의 목표를 연구 덕질로 삼기로 했다. 아니, 진정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보다도 연구를 해야겠다는 비장한 마음마저 들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목표가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마음으로 일단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새해 첫날 출근하며 좋은 목표를 세우다니 완전 럭키비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