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수님들의 건의사항/의견은 아래 메일을 통하여 비전추진단에서 수렴하고 있습니다.
임상교수는 서울의대의 가장 중요한 비전입니다.
서울의대의 가장 중요한 비전은 후속 세대이고, 서울의대 후속 세대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은 임상교수님들이십니다. 김정은 학장님 이하 현 학장단에서는 비전추진단을 통해, 병원 임상교수와의 소통을 증진시키고 대학에서의 역할을 확대하고자 합니다. 비전추진단은 카카오톡 채널 [新서임당: 새로운 서울의대-임상교수 소통마당]을 개설하여 의과대학에서의 소식을 임상교수님들께 전달하고, snuh@snu.ac.kr 메일 계정을 통해 임상교수님들의 건의와 질문을 받을 계획입니다. 임상교수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서울의대는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제언 부탁드립니다.
비전추진단 올림암울하다. 젊은 의사도 중견 의사도, 환자들도 국민들도, 행정부의 중간 공무원들도.. 모두가 몇 달째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 있다. ‘다음 주면, 다음 달이면 끝나겠지’ 하던 상황도 이제는 ‘과연 올 한해로 끝날 일일까?’ 를 넘어 사실상 의료 붕괴의 서막이라는 말들이 이미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이(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누군가의 성동격서(聲東擊西)가 아닐까 하는 꺼림칙한 생각이 든다. 전 국민과 의사들이 동쪽에서 이 난리를 치르는 동안, 서쪽에서는 누군가 조용히 무언가를 빌드업(build-up) 중인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의료의 구조적 문제는 너무나도 많지만, 여러 전문가들은 지금 당면한 가장 절박하고 근본적인 문제로 ‘국민건강보험 재정 고갈’을 꼽는다(이하 건보재정 고갈).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의 소위 ‘싸고 좋은 진료’(이 또한 옛 말이 되어가고 있지만)라는 비현실적인 시스템을 가능하게 한 것은 [A. 국민 건강보험 제도]와 [B. 의사 인력 갈아 넣기]라는 점을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는데, 두 개의 축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지금 모든 관심이 동쪽의 [B]에 집중되어 있을 동안, 누군가는 지금 착실히 서쪽의 [A]를, 건보재정 고갈 이후의 시대를(자신들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서) 준비하고 있지는 않을까.
[A]의 결말을 논할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 ‘의료 민영화’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건보재정 고갈 이후의 상황을 온전히 담기에는 다소 작고 나이브한 그릇이 아닐까 싶다. 건보재정 고갈은 단순히 공기업 한 개가 민간기업으로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아주 중요한 사회 안전망 하나가 소멸하고, 이에 따라 대한민국의 모든 재정 시스템이 재구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수의 누군가에게는 축복이자 기회일 수도 있겠으나,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재앙일 수 있다.
대부분의 정책적 재앙은 개구리를 천천히 삶듯 조용하게 다가온다. 지금의 의료대란 사태처럼 떠들썩한 경우는 흔치 않다. 정책 변화 당시에는 체감되지 않다가 5-10년 후에야 “어? 그때와 달리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지?”라고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이 되면 되돌리기는 늦은 상태이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먹거리(라고 쓰고 폭리라 읽는다) 시스템을 이미 갖춰둔 상태가 된다.
건보재정 고갈 후의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우리의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가난한 환자들이 더이상 대형병원 진료를 보기 힘들 세상? 의사가 보험회사에 종속되고 우리의 등급이 소고기 마블링처럼 노골적으로 매겨질 세상? 그 와중에 서울대 교수들은 좋은 등급으로 매겨질 테니 우리의 월급은 올라갈 세상? 미국식 민영화? 아니면 아예 영국식 공공 시스템에 흡수?(물론 이것은 매우 과장된 단순화이다. 미국과 영국은 그들의 대표 이미지와 달리 보완 시스템이 상당히 많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는 폐지될 테니 우리 월급에서 더이상 건보료를 떼지 않으려나? 더이상 마음대로 서울대-아산-삼성 교수들을 쇼핑하는게 어려워진 세상? 아니 그 전에.. 건보재정 고갈은 정말 오기는 할까? 언제쯤 오나? 막을 방법은 없나? 막아야만 하나?
여러 예상이 있겠으나, 나는 아래 두 가지가 가장 근본적으로 걱정스럽다. 첫째, 모두가 상상만 할 뿐 아무도 ‘능동적, 입체적으로 판을 그려내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공청회는 각 직역의 원론적 소원 수리로 그치고 있다. 본래 능동적/입체적으로 판을 짜야 할 주체는 정부인데, 정부는 지금 동쪽의 [B]에서 이상한 폭탄을 터뜨려 놓고 서쪽의 [A]에서는 손을 놓고 있다. 둘째, 건보재정 고갈 이후의 미래상을 그리든, 건보재정 고갈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하든, 사회 구성원 간의 의견 조율이 ‘합리적이고 투명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지금은 과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상 없이 흘러가는 대로, 그리고 조율 과정이 생략된 채로 맞이하는 건보재정 고갈 상황은(누군가 소수집단의 이익에 맞게 설계될 것이므로) 국가 전체로는 재앙이 될 수 있다.
대형 병원 의사들에게는 급여나 로딩 면에서 더 좋은 상황이 올 수 있다. 재정적 여유가 충분한 이에게는 ‘나랑 상관없는 사람들 병원 쇼핑시켜 주려고 내 소득에서 뭉텅이로 떼어가는’ 건보료가 사라지니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정책을 이상한 방향, 이상한 과정으로 설계하여 그 허리가 붕괴된 사회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상실하고, 결국 공동체 자체가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숱하게 보아 왔다. 건보재정이 절대선이고 민영화가 절대악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의 포인트는 건보재정 유무를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건보재정 유지-개혁-소멸 등등 ‘각 시나리오에 따른 미래 모델을 선제적으로 그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손놓고 운석을 맞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가 상황에 대한 그립(grip)을 쥐고’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정부가 없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전문가 집단이라도 그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이래저래 힘든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다시 한번 암울하다)
어떤 집단이 ‘실제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힘’을 가지려면 아래 다섯 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 1단계. 현재의 문제점들을 최대한 명확히 파악하고
- 2단계. 이를 극복할 10년 후 20년 후의 미래 청사진을 그린 후
- 3단계. 사회적 의제를 선점하여
- 4단계. 여론의 지지를 받고(지속적인 홍보이든 전문가 집단의 건강한 자정작용이든)
- 5단계. 입법부, 행정부에 실질적인 압박을 가한다.
대한민국 정부의 문제는 1,2단계를 건너뛴 채 바로 3단계에서 ‘이상한 전장에서 이상한 폭탄을 터뜨린’ 것이 아닐까(성동聲東 이라기엔 너무 큰 폭탄을..). 물론 나름으로는 1,2단계를 열심히 했다 주장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설픈 탁상공론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4단계에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5단계에서 정부가 물러서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지지율이 낮은 정부일수록 그나마 남아 있는 국민 지지 영역에 집착하기에 이 싸움은 끝이 나지 않고 있다.
한편 우리는 어떠한가. 의사단체는 나름 1단계는 열심히 하지만, 2~4단계를 건너뛴 채 [5단계]에서 그저 정부가 우리 편이기를, 국민이 우리를 이해해 주기를 바래 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5단계의 실질적 힘은 우리끼리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4단계]의 국민 지지에서 나온다. 우리는 선제적으로 국민 여론을 우리편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그저 공격당하면 그때서야 반응하는 ‘상처입은 착한 피해자’의 스탠스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현대 사회에서 국민 여론은 정말 중요하고 강하다. 우리가 진료실에서 상처입는 일부 공격적 보호자들 혹은 유튜브-포털의 일부 비이성적인 댓글들에서 보이는 [국민]과, 진짜 여론을 주도하는 다수 [국민]은 같지 않다. 후자는 훨씬 현명하고 훨씬 강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정부-전문가-국민이 함께 1, 2단계를 주도하여 3, 4를 거쳐 5까지 이르는 것이겠으나, 이는 난망해 보인다. 대안으로 모든 의사 집단이 함께 1~5단계를 주도하면 좋겠으나 이 또한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다양하기에 어려워 보인다. 이것도 안 된다면 교수 단체, 개원의 단체, 전공의 단체, 환자 단체 각각 자신들이 그리는 [2단계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짜야 하지 않을까. 소위 국민 대타협이나, 각종 공청회가 매번 실패하는 이유는 각 집단 별로 [1단계 문제점 파악]까지만 하고 모였기 때문에 공허한 입장 차이만 확인 후 끝난 것이라 생각한다. 알맹이 있는 모임을 하려면 각 직역 별로 1단계를 넘어서서 [2단계의 구체적/입체적인 미래 모델]까지 만든 후에, 그것으로 싸우든 조율하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 그 누구도 [구체적인 2단계의 미래상]을 손에 쥔 집단이 없다. 그저 [1단계의 비판]만 가지고 공허한 칼싸움을 할 뿐이다. 정부의 [정책 제안서]가 엉망이면, 우리는 비판만 하는게 아니라 우리라도 [정책 제안서] 및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바빠 죽겠는데..
인구 구조의 축복 종료, 전 국민 의료 이용량 증가,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실손 보험 및 비급여 제도 허점 등으로 건보재정 고갈은 어느새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를 막아내려면 어떤 변혁이 필요할까. 혹은 건보재정 고갈 자체는 받아들인다면 그 이후의 한국의료를 어떤 식으로 구축할까. 특정 국가를 모델로 삼기보다 이제는 전세계인이 참고할 새로운 모델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정부도, 전체 의사도 그 모델을 만들지 못한다면 최소한 서울 의대라도, 최소한 보고서나 정책 제안서 한 편이라도 발간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비대위에서 진행 중이신 여러 토론-강연 프로그램에 매우 감사한다. 나는 이것이 2단계를 위한 우리만의 훌륭한 1단계 빌드업이라 생각한다)
‘병을 고치면 소의, 사람을 고치면 중의, 사회를 고치면 대의’라는 표현은 이제 진부한 클리셰가 되었을 정도로 현대 사회는 전 분야에서 톱니처럼 맞물려 있다. 나는 착하고 성실하게 환자만 봤는데 나한테 왜 이래? 라는 말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의사 집단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두들겨 맞는’ 입장이 되지 않으려면, 이제는 상처입은 착한 피해자에서 능동적인 이슈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5년, 10년, 20년 후의 구체적인 미래 모델을 그리고, 지속적인 메시지 전파와 내부의 자정 작용을 통하여 [4단계]의 힘을 키워야 한다. 다시 성동격서(聲東擊西)로 돌아와서, 소수의 이익집단이 설계하는 서쪽의 미래에서 우리가 장기 말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 대로 구체적 미래상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동쪽에서 터진 폭탄이 너무나 크다. 다들 여기 대응할 여력도 없어서 건보재정 고갈 같은 이야기가 한가하게 들릴 지경이다. 혼돈의 시대. 대한민국 의료의 길은 어디인가. 그리고 서울의대의 역할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