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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봅시다

손세영 학생(의학과 1학년)
< 손세영 학생(의학과 1학년) >

안내 말씀드립니다. 열차 내에서 판매 및 판촉 행위를 하시는 분은 다음 정류장에서 즉시 하차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웃긴 안내방송을 들었습니다. 평소처럼 열차 간격 조정을 위해 잠시 속도를 늦춘다는 방송이거나, 혹은 비상 시 탈출 방법을 알려 주는 방송이겠거니 했는데 열차 안 잡상인들은 당장 이 열차에서 내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차당한 잡상인은 집에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요. 일단 지하철은 다시 타지 못할 텐데 말이죠.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낯선 곳에 덩그러니 남겨졌을 잡상인이 안쓰러워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남 일 같지가 않아서요.

서울에 갓 올라와 어떻게든 사람들을 만나려고 애쓰며 저를 홍보하던 새내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제 상품은 제 자신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제가 애써서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가 밉고 싫어도 맞부딪히고 부대끼고 시간을 공유하며 저라는 사람을 보여줄 수 있던 시간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면서는 몇 번의 만남 안에 내가 당신에게 적합한 사람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다음 기회가 잘 오지 않더군요. 가볍게 스치는 관계들, 그리고 낯선 장소 속에 홀로 서서 외로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저는 너무 진하지 않은 차처럼 오랫동안 우려야 맛이 나는 사람이라서요.

다음 기회는커녕 요즘 세상에선 단 한 번의 기회도 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지하철역 앞에서 전단지 나눠 주시는 분들입니다. 북적이는 역 출구 앞에서 죽 늘어서신 전단지 아주머니들도 장관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 많은 전단지 아주머니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무심히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단지 한 장만큼의 빈틈도 없는 사람들이 낯설었습니다. 뒷면을 보여주지 않는 달처럼,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 얼굴들이 무서웠습니다.

모두가 남들에게 무관심합니다. 나와 관련이 없다면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시간을 쓰지도 않아요. 저도 얼마 전에 드디어 ‘1호선 광인’을 만났습니다. 사실 1호선에서 만난 건 아니고요, 광화문에 놀러갔다가 만났지만 제가 생각한 1호선 광인의 이미지에 부합했기에 그냥 1호선 광인을 만났던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의 광화문은 시끄러우면서도 평화로웠습니다. 무덥지만 청량한 날씨, 틀어 놓은 분수대 아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젊은 부부들, 은은하게 백색소음처럼 들리는 시위대의 소리까지. 그 사이를 한 할아버지가 열심히 누비면서 전 정권에 대한 어떠한 말들과, 북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와, 그리고 그런 비슷한 말들을 열심히 설파하고 계셨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무도 그 할아버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일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할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가 외치는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요. 그렇게나 시끄러웠는데.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불쾌하니까요.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고, 딱히 나랑 관련 있어 보이는 말도 아니고, 팩트도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들입니다. 그냥 소음의 일부로 취급해 버리는 것이 당연하죠. 저도 평소 같았으면 아마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 1호선 광인 같은 할아버지에게 신경을 끄지 못했던 건 요즘 우리들의 삶이 그 할아버지 같아서입니다.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많은 목소리들을 냅니다. 하지만 어쩐지 청중들은 불편한 기색입니다. 그래서 욕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무시하기도 합니다. 혹은 아예 아무 관심이 없거나.

참 답답하고 속 터지지만 그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모두가 자기 갈길 가기 바쁜 삶을 살고 있으니. 아무도 사지 않을 물건들을 팔려고 하는 잡상인들과 자기만 아는 말들을 외치는 광인들은 다음 정류장쯤에서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듯합니다. 또 어디 세상살이가 남 힘든 것까지 알아줄 만큼 여유가 있나요. 그 사람들도 다른 곳에 가서는 자기 삶의 아픔들을 쏟아내는 또 다른 1호선 광인들일 텐데. 남의 고통은 눈감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 피해가 나에게까지만 닥쳐오지 않는다면.

사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다 1호선 광인들일지 모릅니다. 모두가 나를 좀 알아달라고, 내 말을 들어달라고 나 너무 힘들다고 노이즈 캔슬링을 한 승객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요. 그런데 사실 승객들도 무관심하지만 외치고 있는 1호선 광인도 듣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쌍방의 무관심이라고 해야 될라나요. 나를 알아주길 바라면서 남을 알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간 주제넘은 말을 해보려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기회를 주고 돌아봐 주면 안될까요. 수용할 순 없어도 그냥 이해해 보려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들어보면 안될까요. 요즘 세상은 많이 날 서 있습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분노하고 가끔 가시 돋친 말을 내뱉습니다.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잘못에는 한없이 관대해지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상처에는 너무나 가차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앞만 보고 있습니다.

그 도도한 달도 가끔은 조금씩 고개를 돌린다고 합니다. 타원인 달의 공전 궤도 때문에 달의 공전 속도가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하면서 약간의 뒷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조금씩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삶을 이해해 보려 하면 좋겠습니다. 이런다고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나지도, 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지도 않을 것이란 걸 압니다. 억울하기도 합니다. 남들은 내 말을 알아주지 않는데 왜 나는 너희의 고충을 이해해야 하냐고요. 하지만 들어주지 않을 말들만 계속 외치고만 있는 것은 너무 외롭지 않습니까. 내 생각을 주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남의 생각을 듣는 것은 저희가 할 수 있습니다(물론 타인의 생각을 무조건 수용하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말의 내용을 고칠 순 없어도 말의 방식을 매끈하게 바꾸는 것은 저희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타인에게 더 귀 닫게 되지 않기를, 우리만의 세계에 더 갇히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떠돌이 잡상인들을 태우지 않는 지하철이, 필라테스 전단지 한 장도 들어갈 공간이 없는, 그런 가방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약간만, 뒤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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