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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회 의사국가시험 일대기

유태웅 학생(의학과 4학년)
< 유태웅 학생(의학과 4학년) >

매년 하반기, 전국의 의학을 배우는 젊은 의학도들에게는 한 차례 중요한 사건이 찾아온다. 그것은 졸업을 앞두고 찾아오는 의사국가시험이다. 의과대학에서 그간 배운 의학이라는 학문의 수준을 시험받는 자리이자, 이제는 그 학문이 하나의 기술로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9월부터 11월 초까지 진행되는 실기시험을 합격한 응시자들은 1월 첫 주 필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 교수님들이나 선배들에게 의사국가시험에 대해 여쭤볼 때면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당연히 합격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어려운 시험 아니니까 적당히 공부해도 충분히 합격할 수 있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지만 위로를 듣고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슴 한 켠 적잖은 긴장감을 안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되어 묵직한 불안감이 해질녘 땅거미 같이 찾아온다.

설마하니 불합격할까, 아니야 지금 내 실력에 의사면허를 받게 된다면 그건 ‘license to heal’이 아니라 ‘license to kill’일 거야.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회오리치지만 시간은 의학도들이 제자리에 서서 마음을 정리하고 안심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옅은 긴장감 속에 참고서를 펴고 공부를 시작한다. 그래도 4년의 시간 동안 해온 공부라서 그럴까,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나면 그동안 배운 것들이 다시 정리되는 기분도 들고 이전에 기억날 듯 말 듯했던 개념들이 자리잡기 시작하며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듯한 즐거움도 느껴진다. 그렇게 참고서로 개념을 정리하고, 시중의 기출문제 문제집을 풀어보며 공부를 하다 보면 의사국가시험 시험 범위 말미에 학생들을 적잖게 당황하게 만드는 과목을 마주한다. 바로 ‘예방의학’과 ‘의료법’이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실습한 내용들은 내과나 외과와 같은 임상의학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방의학과 의료법 공부와는 거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시험을 앞두고 마주하는 이 두 과목은 이제껏 배운 것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고 그 익숙하지 않은 내용들은 전부 외워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를 비롯한 학생들을 놀라게 만든다. 새로운 내용들은 신선하고 푸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시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두운 긴장감에 섞여 잿빛 구름처럼 변하고 만다.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새롭게 알게 되는 내용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시험이 다가오고 있는 데에도 여전히 새로운 내용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실습 일정이 끝나 공식적인 학사 일정이 없어진 12월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이다. 공부하다 창 밖을 보면 하늘에서 내린 눈이 쌓여 가고, 내 실력도 눈처럼 쌓이길 바라지만 내일 아침이면 녹아 없어지는 현실만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의과대학 입학 전과 비교하면 마음이 단단해진 걸까, 외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현실 앞에서도 이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 어느덧 그날이 목전으로 다가온다.

2024년 1월 4일, 전국의 여러 시험장에서 2024학년도 제88회 의사국가시험 필기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의사국가시험은 이틀간, 각 2교시, 통합 4교시로 치뤄진다. 각 교시마다 80문제를 105분 내에 풀어야 한다. 첫날 첫 교시는 의료법(20문항)과 의학총론(60문항) 시험이 이루어지고, 이후 나머지 3교시 동안에는 의학각론(240문항) 시험이 이루어진다. 2022학년도부터는 CBT(Computer-based Test)로 시험 방식이 대체되었다. 이미 학교에서도 2년간 컴퓨터로 시험을 쳤기 때문에 변경된 시험 방식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시험장이 무척 쾌적하게 준비되어 있어서 시험 치는 동안 시험 환경의 문제로 지장 받지는 않았다. 본 시험은 항상 모의고사나 공부하며 풀던 문제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시험장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시험 사이 쉬는 시간이 30분이나 된다는 것에 의아했지만 막상 아침 1교시가 끝나고 나면 그 30분이 짧게만 느껴진다.

2024년 1월 5일 오후 1시 5분, 컴퓨터 우측 상단에 표시된 남은 시험 시간이 모두 사라지고 시험종료 안내문구가 나타났다. 시험장 관리 위원의 안내에 따라 시험이 종료되고 친구들과 함께 시험장 밖을 나왔다. 이미 시험이라면 많이 쳤기 때문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름 긴장을 했었는지 후련한 마음과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졌다. 다른 친구들은 저녁에 공개되는 시험 답안을 확인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미 치뤄진 시험 돌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무엇보다 320문항이나 되는 문제들을 다시 복기하면서 정오표를 만들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오랜만에 공부에 대한 다른 생각 없이 푹 쉬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문득 시험결과에 대한 생각이 수면 위로 튀어 오를 때가 있었다. 설마하니 합격하겠지, 그래도 틀린 문제들이 기억나면서 아쉬운 순간들이 많았다.

2024년 1월 16일 저녁, 예정보다는 하루 빨리 결과를 통보받았다. 합격이었다. 시험장에서 나올 때처럼 약간의 해방감이 다시 느껴졌다. 나는 결과보다 과정에 자부심이나 아쉬움을 느끼는 성격이기에 결과에 대해서는 나름 무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합격’ 이라는 문구에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보니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안도감과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된 기분이다. 알을 깨고 나오는 동안에는 어서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막상 알을 깨고 세상을 조우하자 나는 아직 털이 마르지도 않은 햇병아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에게 허락된 의사면허증이 나의 우려처럼 ‘license to kill’이 되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 배운 것보다 더 많이 배우고 익혀야 한다. 다른 여타 학문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의학은 특히 더 평생 배우고 익혀야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것이 그저 나의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온 환자들에게까지 실패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 해온 공부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을 생각하자면 답답한 마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특히 이제는 한 명의 의사로서 책임을 지고 의료행위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기에, 더 이상 어리숙한 학생의 행동으로 웃고 넘어갈 일들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 앞에서 실수할까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며 다짐한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면 기대도 되고 조금 설레기도 한다. 지금의 설렘과 기대, 불안과 걱정이 모두 앞으로의 시간에 녹아 단단해진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의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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