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말부터 2020년 초까지 방영되었던 남궁민 주연의 드라마 ‘스토브리그’.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현실의 씁쓸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야구단 단장의 거침없는 행보로 야구팬들에게 짙은 공감과 통쾌함을 함께 안겨주었던 드라마가 있었다. 그리고 2022년, 은퇴한 야구선수들을 다시 그러모아 최강의 팀을 목표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가 방영을 시작했고 높은 화제성과 함께 올해 시즌2를 진행 중이다. 이상한 점은, 야구는 축구와 비교했을 때 프로리그가 운영되는 국가도 몇 개 없고 국가대항전에서 예선 탈락을 할 만큼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는 올해는 시즌 전부터 온갖 사건사고에 파묻혀 야구 팬들 다 떠나가겠다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정작 23시즌이 시작되니 매일같이 전국적으로 몇만 명의 관중을 몰고 다닌다. 그 괴상하고 독특한 현상에 대해, 25년 차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야구를 보았지만, 나의 야구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시작한다.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우리나라 포수가 심판의 잘못된 판정으로 퇴장당한 후 더그아웃에 미트를 던져버리는 모습을 TV 생중계로 보았다. 그리고 그 판정을 뚫고 쿠바 국가대표의 병살타로 올림픽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까지도 초등학교 3학년의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하필 그 포수가 우리 팀(롯데 자이언츠)의 포수여서, 그때부터 FA로 다른 팀을 갈 때까지 장장 10년가량을 좋아했던 것 같다. 또래들이 연예인을 좋아할 때 나는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했고, 콘서트장에 갈 때 가족과 함께 야구장에 갔으며, 연예인 굿즈를 고를 때 롯데 유니폼을 골랐다. 요즘도 크게 달라진 건 없어서, 우리 집은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오후 6시 30분부터 TV가 늘 켜져 있고 간혹 잠실에 원정 경기를 올 때면 매번 빠짐없이 티켓을 산다. 남들이 볼 때는 유난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한 팀만 응원하며 안타 하나에 울고 웃었던 나에게는, 야구는 취미를 넘어선 삶의 일부분이다.
올해 동기들에게 유독 많이 받았던 질문이 있다. “한 명의 사람을 좋아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어떻게 하나의 팀을 좋아할 수가 있어?” 매 시즌 선수가 바뀌고 시즌 중에도 트레이드로 선수가 바뀌는 야구 판에서 선수에 대한 애정으로는 팀을 응원하기 어렵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25년 동안 너무 당연하게 하나의 팀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나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받은 느낌이라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한다’고 표현된 문장에서, 내가 실제로 좋아하는 객체를 파헤쳐 보면 그 답이 나온다. 나는 ‘롯데’라는 대기업을 응원하는 것도 아니고 ‘롯데 자이언츠’라는 롯데그룹이 운영하는 부산 연고지의 프로야구단을 응원하는 것도 아니다. 선수 개인을 좋아할 때도 있지만, 못하는 선수가 삼진을 당하기보다는 잘하는 선수들이 홈런을 쳐서 팀을 승리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나는, 어린 시절 자이언츠가 내게 선사했던 환호성으로 가득했고 웃음소리로 넘쳤던 시간들을 좋아했고,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끼리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던 야구장을 사랑했다. 그 시공간에는 오랜 시간 쌓아 온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어서 계속해서 초대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내가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이유는, 단순히 선수 한 명에 대한 호감이 아닌, 그 팀이 나의 삶에 선물한 가장 행복하고 애틋한 기억이 지속되기를 원하는 마음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보면, 내가 응원하는 팀은 매번 승리해서 나에게 좋은 기억만 남겨준 것처럼 보인다. 현재 의학과 4학년인 나는, 대학에 온 이후로 자이언츠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내가 죽기 전에 우승을 볼 수는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도 있다. ‘야구의 승패가 가정의 분위기를 정한다’고 하는데, 6월 내내 패배만 하고 있는 우리 팀 덕분에 집안 분위기는 매일같이 우울하고 다들 신경이 날카롭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 팀 팬들이 고혈압이 생기는 이유도, 야구만 보면 내 성격이 안 좋아지는 이유도, 모두 우리 팀의 연패 때문이다(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여담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고향이 경상남도 남해인 우리 어머니의 영향으로 롯데 팬이 된 딸로서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팀은 세대를 거쳐 대물림된다. 한 야구 동영상에 이런 댓글이 있었다. “대전에서 나를 낳아 한화 팬이 되게 한 아버지를 원망했는데, 지금 내 손을 잡고 대전구장 가고 있는 아들을 보니 퉁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팀을 정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요인(이자 risk factor)은 가족이다. 만약 나처럼 선천적으로 정해진 팀이 아니라 스스로 팀을 정할 기회가 있다면, 부디 처음 팀을 정할 때 후대를 위해서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을 팀을 고르기 위해 심사숙고하길 바란다. 한번 정하고 정을 붙인 뒤로는,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명대사처럼 “아무리 열 받아도 팀세탁은 죽어도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패배를 밥 먹듯이 하고 몇 년째 비밀번호를 찍고 있는(하위권을 전전한다는 뜻의 야구 관용구) 우리 팀이지만, 결국 2월이 되면 시범경기 일정부터 찾아보며 기대를 가지는 내 모습에도 헛웃음이 나온다. 수없이 기대하고, 경기 시작하고 1회만에 배신당하고, 그럼에도 다시 기대했다가 한 번 이기면 세상이 떠나갈 듯 소리치며 좋아하고. 승리보다 패배가 많은 날들에 수없이 화를 내고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이 팀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이 유형이 아니라 무형의 대상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나는 아마 야구를, 야구와 함께 보낸 시간을 사랑하는 것 같다. 정확히는, 고백할 방법도 없고 보답 받을 수도 없는, 그래서 차이지도 못해서 계속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 마음은 아마 짝사랑인 것 같다. 그러니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대학 와서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본 것도 다 야구가 내 마음을 가져갔기 때문일 거라고 애써 책임을 돌려봐야겠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평일 야구는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한다. 잠실 야구장 3루쪽 관중석에 앉아서 야구를 보다 보면, 다홍빛으로 차오른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완성하는 석양을 볼 수 있다. 빌딩 숲 속인 서울에서 야구 팬들만 알고 있는 절경 중의 절경이다. 그런 풍경 아래에서 따끈따끈한 치킨에 맥주 한 모금을 상상해 보면 굳이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친구끼리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만약 일상의 삭막함에 지쳐 에너지 충전이 필요하다면, 치킨 한 마리 사 들고 야구장에 가 보시기를 적극 추천한다(물론 야구가 이기는 날이면 더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