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3학년 강지형
분당서울대병원으로의 파견 실습이 있는 날이면, 해가 뜨기 전 어슴푸레한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한다. 샤워를 하며 눈곱과 함께 졸음을 털어낸 뒤 양복을 갖춰 입고, 가방을 손에 든 채 터벅터벅 걸어 행정관 앞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린다. 몸을 조금 기민하게 움직여 일찍 도착한 날이면, 행정관 앞을 목적 없이 서성이며 평소 수십 번 지나다녀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배경’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낸다. 단연 가장 이목을 끄는 건 수염이 북슬북슬한 대머리 할아버지의 동상 옆에 놓인, 장문의 선언이 적힌 비석 하나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제하에 적힌 글의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며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나는 인류에 봉사하는 데 내 일생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나는 나의 은사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나는 양심과 위엄을 가지고 의료직을 수행한다.
나는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것이다.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킨다.
나는 의료직의 명예와 위엄 있는 전통을 지키며, 동료는 나의 형제자매처럼 여긴다.
나는 환자를 위해 내 의무를 다하는 데 있어 나이, 질병, 장애, 교리, 인종, 성별, 국적, 정당, 종족, 성적 지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 생명을 그 수태된 때부터 최우선의 것으로 존중하며, 위협을 받더라도 인류를 위한 법칙에 반하여 나의 의학지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 모든 약속을 나의 명예를 걸고 자유의지로서 엄숙히 서약한다.
아직 선서를 하지 않은 의대생이라 하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이 유명한 서약의 본래 이름은 사실 제네바 선언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며 태양신 축일이 성탄절이 되었듯,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이름을 1948년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채택된 개정문이 덧입은 것이다. 개인적 궁금증에 찾아본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의술의 신 아폴론과 아스클레피오스, 휘기에이아, 파나케이아, 그리고 모든 남신과 여신의 이름으로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이 선서와 계약을 이행할 것을 맹세한다. 나는 이 의술을 가르쳐준 스승을 내 부모와 똑같다고 여기고 삶을 함께 하며, 그가 궁핍할 때에 나의 것을 그와 나누고, 그의 자손들을 내 형제와 같이 여겨 그들이 이 기술을 배우고자 하면 보수와 계약 없이 가르쳐줄 것이다. 의료지침과 강의 및 그 밖의 모든 가르침은 나의 아들과 나를 가르친 스승의 아들, 그리고 의료 관습에 따라 선서하고 계약한 학생들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전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를 이롭게 하기 위해 섭생법을 쓸 것이며, 반대로 환자가 해를 입거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겪게 하기 위해 그것을 쓰는 것은 금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요청에도 치명적인 약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와 같은 조언을 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여성에게 낙태용 페서리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삶과 나의 의술을 순수하고 경건하게 유지할 것이다.
나는 칼을 쓰지 않을 것이고 결석환자라 할지라도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나는 어느 집을 방문하든 환자를 이롭게 하기 위해 방문할 것이며, 고의적인 비행과 상해를 삼가고, 특히 자유인이든 노예이든 남자든 여자든 성적 접촉을 삼갈 것이다.
치료하는 도중 및 그 이외의 시간에 환자들의 삶에 관해 내가 보거나 들은 것은 무엇이든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그것들을 성스러운 비밀로 지켜 누설하지 않겠다.
이 선서를 이행하고 어기지 않으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영원한 명예를 얻고 나의 삶과 기술을 향유할 수 있길 기원하고, 내가 선서를 어기고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이라면 내게 그 반대의 일이 있기를 기원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쓰인 히포크라테스 선서 원문과 20세기 중반에 쓰인 제네바 선언은 각각 고대와 현대의 의사들에게 일반적으로 어떤 덕목이 기대되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둘을 비교해보면 환자와의 비밀 유지, 인류에 대한 봉사, 차별 금지 등 우리가 아는 의사의 덕목이 얼마나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두 선서 사이에는 바뀐 것들도 바뀌지 않은 것만큼이나 많다. 내과학으로만 한정되던 의학은 이제 그 범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고, 의사조력자살이나 낙태의 문제는 금기의 성역에서 인권을 주제로 한 논란의 한복판으로 옮겨왔다. (원문의 이런 문구들은 주로 코스 학파보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정치적 영향에 의한 것으로 해석된다.) 무엇보다 두 텍스트를 비교해보면, 현대 의학 발전의 과정은 고대의 ‘미신적 의학’으로부터 신을 지워나가는 탈종교화의 과정이었음이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선서하는 ‘대상’부터 두 선언문은 극명한 대비를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의사들이 선서하는 대상은 아폴론이나 아스클레피오스와 같은 신들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의 맹세는 ‘내가 이 서약을 충실히 이행하면 내게 축복을 주시옵고, 그렇지 않다면 저주를 내려도 좋사옵니다’라는 일종의 계약이었다. 이천 년도 넘는 세월이 지나며 수많은 신이 죽고 그 자리를 다른 신이 대체해 왔다. 1948년의 선언문이 쓰인 시점에 그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선 자는 인간 자신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의업의 길을 걸을 것을 허락하며, 신들에게의 맹세는 인간 자신의 명예를 건 다짐으로 대체되었다.
의술에서 신성이 사라지면 의술을 베푸는 의사 역시 종교인의 의무에서 해방된다. 그는 여전히 의사로서 환자에 대해 지켜야 하는 도덕적 의무들을 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료인으로서의 직업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 스스로를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의사라는 이유로 삶 전체를 경건하게 살아야 할 의무는 그들에게 더 이상 없다. 의료직의 명예와 위엄 있는 전통을 지키겠다는 지금의 선언은, 삶과 의술을 ‘순수하고 경건’하게 유지하겠다는 고대의 맹세에 비하면 다소, 그러나 분명 누그러진 감이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원문에서 묘사되는 의술의 전수 조건은 비인부전 부재승덕((非人不傳 不才承德, 사람됨에 문제가 있는 자에게 벼슬이나 재능을 전수하지 말며, 재주나 지식이 덕을 앞서게 해서는 안 된다)의 조건 하에 비밀스럽게 전수되는 무공(武功)을 떠올리게 한다. 함부로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나, 한번 받아들인 제자는 그 스승과 마치 수양아들-양아버지의 관계를 맺을 정도로 끈끈한 관계가 된다. 체계적인 의학 교육 시스템 및 자격증이 부재했던 고대에, 이러한 도제식 교육은 의사 집단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나름대로 의료인의 질을 관리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요즘처럼 의사들이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건강 칼럼을 쓰고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다가는 끔찍한 저주가 내릴 터였다. 다행히 저주를 내릴 신이 남아있지 않다고 믿는 현대에 그럴 걱정은 덜었다. 의료인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개인의 의료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상 부여되는 라이선스이고, 의료 지식은 모두에게 개방된 공공재가 됐다. 누구든 해리슨이나 사비스톤 교과서를 읽어볼 수 있고 건강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볼 수 있다. 이제 의학지식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넘쳐나서 문제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건 신에 대항해 승리를 쟁취한 인간의 이성을 두고 한 자랑스러운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기독교 윤리에 기반을 둔 모든 인류의 사상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재구성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자의 경고에 가깝다. 스파이더맨도 말했듯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신의 자리를 꿰차고 앉은 인간은 이제 과거 신들이 판단해주던 수많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릴 힘을 가졌고, 또 그래야 할 의무를 지게 됐다.
하지만 한국 의료계는 이런 의료윤리 논쟁에 있어 얼마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한 명의 예비의료인이자 후배로서 발칙하게 묻건대, 우리 의료계가 의료윤리에 대한 논의를 선제적으로 제시하며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 나가지는 못할 망정 정치권의 입김에 오히려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닌가? 지금도 낙태죄 대체입법, 조력존엄사법 등 대한민국의 의료윤리 논의의 판도를 뒤엎을 만한 저력을 가진 수많은 이슈들이 산재해 있다. 과연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얼마나 ‘나 자신의 일’로 여기고 있는가?
생명윤리 분야의 개척자 한 명인 트리스트럼 엥겔하르트가 말했듯, 성공적인 생명윤리에는 더 이상 신학이 필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대의 의사들이 신의 역할을 제대로 대체해낼 때의 이야기다. 우리는 신성한 의술을 펼치던 선배 의사들의 후배된 자로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구관이 명관이었노라고, 차라리 이천 년 전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처음 쓰일 시절처럼 의술은 신의 기술이고 의사는 그 대리인이라고 여기던 시절 의사의 마음가짐이 더 나았노라고 한탄하는 사람에게 변명할 거리가 궁색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