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마당]

51대 학생회 ‘비행’ 소개


취재 : 한지윤 학생(본과 2학년)

지난 1월 서울의대에는 51대 학생회 ‘비행’이 새로운 활보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의대 학생회가 시작한지 새로운 반 세기가 시작되는 학생회이자, 한 번의 선거가 무산된 후 다시 투표가 재개되며 결정된 학생회인 만큼 그들의 각오도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의 의견을 대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보인 학생회를 소개하기 위해 학생 회장인 본과 2학년 육강민 학생과 부학생회장인 본과 2학년 정현수 학생을 모셔보았습니다.  

Q. 안녕하세요!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육강민: 안녕하세요! 제51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회장 육강민입니다.

정현수: 안녕하세요, 부학생회장을 하고 있는 본과 2학년 정현수라고 합니다.

Q. 긴 학기가 끝나고, 짧은 방학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보내시고 계시나요?

육강민: 벌써 방학의 1/3이 지났는데, 사실 날짜로는 일주일밖에 안 되어서 딱히 특별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어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요즘은 밀린 게임을 많이 하는 것 같네요. (웃음)

정현수: 부산 집에 내려와서 쉬고 있어요. 한 학기 동안 방전된 에너지를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재충전하고 있습니다. 학생회 일은 틈틈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고요.

Q. ‘새로운 50년을 위한 첫 도약, 비행’이라는 이름의 51대 학생회가 출범한 지도 7개월이 넘어가고 있는데요, 학생회의 이름을 ‘비행’이라고 지은 계기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요? 

육강민: 출마하기 전, 당시 저희 선본원이었던 조창웅 학우와 셋이서 학생회 이름을 엄청 고민했어요. 선거가 한번 무산된 이후 출마를 결정해서 시간은 촉박한데 이름은 안 떠오르고, ‘51대 학생회니까 이름을 51로 하자.’ ‘이름이 뭐 중요하냐 이름 없이 하자.’ 이런 얘기들이 오고 갔는데 생각해보니 51대면 새로운 반세기의 시작이라 볼 수 있겠더라고요. 근 몇 년 사이에 의과대학 학생회가 많은 발전을 이뤄왔는데 이를 유지하면서도 저희만의 색깔을 입혀 새로운 50년의 출발에 걸맞은 학생회가 되자는 의미에서 ‘비행’으로 짓게 되었습니다. 

정현수: 선본 이름을 생각해보다가, 저와 강민이가 둘 다 ‘딴짓’을 열심히 한다는 걸 발견했어요. 강민이는 밴드를 열심히 해왔고 저는 연극과 뮤지컬을 했었어요. 이러한 저희의 아이덴티티를 담아 보자는 생각에 어딘가 조금은 삐딱한 ‘비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것 같아요. 51대 학생회 선거라는 점에서 새로운 50년의 시작과 하늘을 나는 ‘비행’이 주는 이미지도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육강민: 맞아 장난 식으로 비행 청소년 이런 얘기도 나왔었어요. (웃음)

Q. 지금까지 학생회가 해 왔던 일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육강민: 제 임기가 시작하고 가장 처음에 했던 일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의학과 1학년 대표단은 보통 1월 초에 열리는 골학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에 뽑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안 뽑을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강제성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이에 대한 불편함을 호소하는 학우들도 꽤 있었지요. 이를 해결하고자 올해 골학 오리엔테이션에선 수의대에서 대표를 뽑는 방식을 차용해보았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수의대에서 대표를 뽑는 방식: 지원자를 받고,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은 후, 추천을 거절한 사람과 휴학 등의 사유로 업무가 불가능한 사람을 제외한 후 투표를 진행하는 방식) 이후 의예과 1학년 대표, 부대표를 뽑을 때도 이 방식을 사용하였고 장차 모든 학년에 이 방식을 써볼까 해요. 다른 학년들이 사용하는 카카오톡 투표는 익명성이 보장되지만 투표 인원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미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되면 학우들이 투표를 안 하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현수: 명예 서약을 준비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계속해서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일인데, 드디어 명예 서약 내용을 완성하고 선포식을 준비 중이에요. 이 과정에서 명예서약 TF팀과 의견을 나누고 의과대학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설문을 통해 학우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어 뜻 깊었어요. 학업 부담에 치이던 와중에, 잠시 멈추어 ‘명예로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의 모습이 무엇인지 고민해본 시간은 정말 소중했습니다. 선포식을 통하여 학우들과 다시 한 번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요. 상시 운영하고 있는 여러 복지사업도 뿌듯하죠. 비 오는 날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양심우산을 찾고 불편한 일이 생기면 학생회 카카오톡 플러스친구로 문의를 주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요. 학우들이 학생회를 ‘도움을 주는 곳’으로 인식하고 이용한다는 뜻이니까요. 

Q. 힘든 본과 생활 동안 많은 일들을 하는 것이, 또 학생들을 대표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은데, 학생회장, 부학생회장을 맡으면서 힘든 점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육강민: 가장 힘든 점은 아무래도 회장이다 보니 제가 있어야 하는 자리가 많다는 것이에요. 학생회 내부적인 일이든 학생회 외부적인 일이든 제가 그 일에 얼마나 관여하였든 결국 최종결정을 내리게 되는 건 저인 경우가 많거든요. 일이 적지 않은 점도 있고 학업과 병행하는 것도 부담이 되긴 하지만 아무래도 저에게 가장 부담이 되는 건 회장이라는 직책이 주는 무게인 것 같아요. 한가지 예를 들자면, 총학생회장단과 각 단과대 회장들이 모여 회의하는 총운영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는데 거의 매주 회의가 있어요. 관악까지 가서 몇 시간씩 회의하고 또 이 회의 결과가 16000 명의 학우들에게 영향을 주기에 보통 부담이 되는게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회장님들이 정말 좋은 친구들이고 이런 회의를 통해 관악과 연건이 조금 더 이어질 수 있어서 뿌듯한 면도 있어요.

정현수: 학업과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워요. 시험이 자주 있다 보니 업무를 하다가 호흡이 끊기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학생회 친구들과 다같이 즐겁게 1년간 활동했으면 하는데, 뜻하지 않게 업무를 많이 줄 때가 있어 미안하기도 하고요. 

Q. 네. 힘든 점이 아주 많으셨을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어떤 생각으로 다시 추진력을 얻었던 것 같나요? 학생회장, 부학생회장을 하게 된 계기와도 비슷한 질문일 것 같네요.

정현수: 자리가 주는 책임감과 학생회 사람들의 좋은 기운 덕에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손 놓고 있으면 학우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시에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면 그 결과가 바로 보인다는 점에서 굉장히 재미있기도 해요. 함께 일하는 학생회 사람들이 다들 열정 넘치고 유쾌한 사람들이라,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겁게 활동하고 있어요. 학생담당교수님들과 행정실 선생님들의 도움도 굉장히 많이 받고 있고요.

육강민: 현수 답변이 너무 모법답안인데… 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힘들다는 생각이 줄어들고 다시 추진력을 얻게 되었던 것 같아요. 부회장님이 똑 부러져서 의지가 많이 되는 것도 크고요.

Q. 앞으로의 활동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나 포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육강민: 2학기엔 1학기보다 더 많은 학생회 행사가 있을 예정이에요. 연건 페스티벌 위크와 서연제를 학우들이 알차게 즐길 수 있도록 많이 준비할 것이고, 1학기 학생회 사업 피드백 설문조사를 통해 어떻게 해야 더 많은 학우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여 2학기에는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현수: 학생회의 내실을 다지는 업무도 열심히 하려고 해요. 회계 내역을 공개하고 학생회 비품 리스트를 만드는 일도 그 일환이었죠. 학생회 내부의 업무 방식과 회의 방식도 개편해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외부적으로 티가 많이 나는 일은 아니지만, 항상 더 나은 학생회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니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육강민, 정현수 학우님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며 인터뷰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들을 비롯한 여러 학생회 구성원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앞으로의 활약에 대해 기대를 가져 봅니다. 앞에서 소개되었지만, 여러 학우들과 긴 시간 동안 준비한 ‘명예 서약’은 10월 11일 오후 6시 ‘명예 선포식’을 통해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며, 51대 학생회에게도 큰 응원을 보냅니다.

 

<좌측부터 본과 2학년 정현수 부학생회장, 본과 2학년 육강민 학생회장>

위인들과의 팬미팅: 모스크바 여행기

취재 : 정한별 학생(본과 3학년)

 

모스크바로 출국하기 전 면세점을 구경하고 있는데 내 이름이 불렸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 여권을 제시하고 값을 치르려던 참이었다. 순간 면세점 직원과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불길한 예감을 주고받았다. 부친 짐이 잘못됐을까? 좌석을 잘못 골랐나? 가능한 온갖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뛰어갔다. 

허겁지겁 카운터에 도착하자, 직원이 알듯말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권과 탑승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권 정보를 잘못 입력했나보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물쭈물 내민 탑승권을 잠시 확인한 그녀가 갑자기 탑승권을 찢어버렸다. ‘뭐야. 여행 망한 거니?’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는 와중에 그녀가 싱긋 웃더니 새로운 표를 내밀었다. "럭키하시네요. 비즈니스석 타고 가시게 됐어요."

출발부터 예감이 좋았던 이번 여행은 꽤 갑작스럽게 결정됐다. 종강 무렵, 방학이 고작 2주 남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크게 분노(?)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턱없이 짧았기 때문이다. 학기가 도무지 끝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원통함도 잠시, 마음이 몹시 바빠졌다. 이 짧은 방학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뭔가 거대한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모스크바를 여행지로 선택하기까지는 별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거대한 계획이란 한국 바깥으로 떠나는 것을 의미했는데, 곧바로 현지에 체류 중인 가장 친한 친구 A가 떠올랐다. 그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나에게 모스크바는 충분히 매력적인 여행지였다.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A는 당시 배운 러시아어와(필자는 외국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관련 문화에 대한 관심을 대학교에서까지 이어나갔고, 작년에 유학을 떠났다. 조심스레 연락을 해보았더니 마침 방학을 보내고 있던 A가 크게 반겼다. 흥분된 말투로 일주일간의 계획을 짜두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꼭 보고 싶은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오라는 주문을 했다.

좀체 계획성이라고는 없는 나는 그제서야 고민을 시작했다. 친구 말고 또 무엇을 보고 올까. 장장 이틀 간의 고심 끝에 생각해낸 단 한 가지의 주제는 ‘팬미팅’이었다. 그동안 내가 사랑해왔던 러시아의 음악가들, 문학가들을 만나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라흐마니노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을 향유해왔지만, 그들과 그 이상의 교감을 할 수 없다는 점이 항상 섭섭했다. 마치 바닥에 흩어져 있는 빵조각만 더듬더듬 따라가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래서 나는 직접 그들의 얼굴을 보고, 악보를 읽고, 그들이 머물다 간 터전을 걸어 보기로 했다.

드디어 우리는 일요일(7월 21일) 아침에 만났다. 아침 5시쯤 세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해 현지 SIM 카드를 구매한 뒤 택시를 잡았다. 현지에도 한국과 비슷한 택시 어플리케이션이 있어서, 목적지의 주소와 결제 정보를 입력하고 나니 금세 매칭이 되었다. 반려동물 동반 여부, 동승자 수, 장애 여부 등 다양한 옵션을 선택할 수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최근에 올림픽, 월드컵을 치른 나라답다고 생각했다. 30분 남짓 걸려 도착한 집 앞에서 15분쯤 기다리자 반갑고 익숙한 얼굴이 멀리서 보였다. 모스크바 남동쪽에 위치한 소치에서 휴양을 마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A였다.

광활한 러시아를 여행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체력이다. 땅이 워낙 넓어 어느 곳을 가든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실제로 필자는 일주일의 여행 동안 총 107.9km를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짐을 풀고 난 뒤 거의 곧바로 집을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오랜 친구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내가 비즈니스석을 타고 편하게 온 덕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꽉꽉 눌러 담은 일주일 여행이 시작되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시간들이었지만, 한정된 지면상 가장 기억에 남는 몇몇 순간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위대한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가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16, 17세기에 건축되었다. 차르 일가 및 귀족 여성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죽은 뒤에는 수도원 내의 묘지에 묻혔다. 당시 유행하던 ‘모스크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뛰어난 장식 기법과 그자체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갖지만, 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중요했다. 성당 주변 묘지에 러시아의 뛰어난 지식인, 예술가, 군인들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묻히는 것이 일종의 명예였던 셈이다.

 

묘지에 들어서니 수많은 이름이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각 사람의 묘지에 일련번호를 부여해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러시아 대내외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들이 무척 많았지만, 우선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의 무덤을 찾았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위치를 정확히 찾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묘지 자체가 너무 컸던 데다, 좀 더 최근의 유명 인사들이 묻힌 구역으로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한참을 헤맸다. 결국 근처에 앉아 있던 기념품 가게 주인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고 나서야 제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쇼스타코비치의 묘비였다(위 사진). 자신의 이름을 구성하는 독일어 알파벳을 따서 만든 D-S-C-H(순서대로 레-미b-도-시이며, ‘D’mitri ‘SCH’ostakowitsch에서 유래했다) 음형이 새겨져 있어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이는 실제로 그의 중기 이후 작품 대부분에서 빈번히 사용되었는데,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박진영이 자신의 곡 시작 부분에 ‘JYP’라는 랩을 달아두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의 선율을 마음속으로 흥얼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프로코피예프, 스크리아빈 그리고 체호프(순서대로 아래 왼쪽, 가운데, 오른쪽 사진)의 묘비도 보였다. 이외에도 루빈스타인, 고골 등 문학사, 음악사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들의 묘비가 모두 모여 있었다. 지금도 이곳을 찾아와 헌화를 하고 그들을 기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여전히 나는 그저 그들의 흔적만을 좇을 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우리 사이에 조금 더 강한 유대가 생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직접 만나서 악수하고 응원해줄 수는 없지만, 나만을 위한 팬미팅이 성사된 것 같았다. 당신을 만나러 이렇게 멀리에서 날아온 사람도 있다고, 마음 속으로 편지를 써 보았다.

왠지 으스스한 무덤 토크(?)가 이어지는 가운데, 톨스토이를 만난 건 모스크바에서 약 200km 가량 떨어진 툴라(Тула)에서였다. 귀족이었던 그와 그의 가문은 상당히 넓은 영지를 소유했고, 그는 이곳에서 전원의 삶을 즐기며 주요 작품을 저술했다. <안나 카레리나> 속에서 작가가 레빈이라는 분신을 통해 소박한 삶을 찬미한 이유가 짐작되었다(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 그는 어쨌든 귀족이었다). 그의 무덤 역시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무척 검소했다. 꽃이 놓여있지 않았다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 같은 이 무덤에는 묘비조차 없이 최소한의 수준으로만 단장이 되어있었다. 그가 인류에 남긴 위대한 유산을 떠올려보고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았다.

 

작은 꿈을 이룬 순간

톨스토이 영지를 방문한 날의 백미는 단연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였다. 볕이 드는 들판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곳은 톨스토이 영지 외곽을 둘러싼 숲 및 초지다. 산이 많은 데다 고른 지형의 대부분이 경작지로 활용되는 한국과 달리, 러시아에는 자연 상태 그대로 광활히 펼쳐진 초지가 참 많다. 영지 바깥으로 걸어나가면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질 거라는 오디오 가이드 어플리케이션의(정말 편리한 세상이다!) 권유에 따라 도착한 곳에서, 나는 나지막한 탄성을 뱉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과 허벅지 높이 정도까지 자라 바람에 흔들거리는 이름 모를 한해살이 풀들 때문이었다. 

한참 말 없이 들판을 둘러보던 나를 친구가 재촉했다. 하드코어 트래킹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역시 A다웠다. 나는 싱긋 웃고는 친구를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사람이라고는 거의 한 명도 없는 그 조용한 곳을 걸어나가면서, 유투브에 다운로드 해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평화롭게 걸으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들을 수 있다니. 어린 시절 즐겨 보던 TV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거장들의 음악을 들려주면서 유럽 어딘가의 평화로운 마을을 비춰주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무성의한 영상 클리셰에 왜 그렇게 마음이 설렜는지 모르겠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과 함께 이삭 줍는 농부들이 교차했고, 쇼팽의 바르카롤(Barcarolle: 뱃노래)과 함께 베네치아의 곤돌라가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꼭 저런 곳에 가서, 저런 음악을 다시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곳에서 작은 꿈을 이룬 셈이었다.

물론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늘이 조금씩 궂어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비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흙길이 얼음판마냥 미끄러워지기 시작했는데 마을까지는 아직 한참 걸어나가야했다. 여행 중에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일이나 날씨 같은 것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지만,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신발에 물이 괴어 진득거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 같다. 결국 앞서가던 A가 크게 미끄러져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길이 아주 부드러워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친구는 존엄성을 상실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다가 이내 상황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A 역시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히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다시 걸어나갔다. 걷잡을 수 없이 온 몸이 젖어오고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래서일까. 그제서야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이로 인해 수풀이 사각거리며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참 멋진 순간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었고, 우린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한참을 걸어 드디어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자 그제서야 우리가 무척이나 배고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다행히 바로 근처에 톨스토이 부인의 레시피 대로 요리하는 곳이 있다는 흥미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숙소로 복귀하기 위해 우리가 이용할 기차역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식당에 들어가 흙에 젖은 옷을 간단히 정리하고 주문을 했다. 얼마나 충실히 고증을 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와 상관없이 음식은 충분히 맛있었다. 인적이 많지 않은 동네에 홀딱 젖은 채로 등장한 아시아인 두 명이 신기하고 짠했는지 주인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A가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마침 우리가 갈 예정이었던 기차역이 주요 화두가 되었다. 그러자 친절한 아주머니가 직접 우리를 데려다주겠다며 앞장섰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가져다준 새로운 행운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주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이 지역을 적극적으로 관광지화하기 위한 노력들이 10여 년쯤 전에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진행이 지지부진해졌다고 한다. 당시에 지어졌던 호텔 역시 완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업조차 해보지 못하고 폐건물이 되었다고 했다. 행정 수준에서 뭔가가 크게 엎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가 향하고 있는 역도 마찬가지여서, 지금은 열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이 되어버렸다고 그녀가 덧붙였다(!). 순간 통역을 해주는 A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 모두 동시에 커다래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우리가 그 역을 관광삼아 둘러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불안에 휩싸여 부랴부랴 확인을 해보았다. 다행히 우리가 가진 정보가 맞았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가 하루에 단 두 번 정차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간이역이었다. 동네 사람마저 모르고 있는 기차편에 올라 여권을 제시하고 나서야 내심 떨치지 못한 불안감이 해소되었다. 역무원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 외로운 느낌마저 드는 작은 역을 우리는 그렇게 떠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기차 속에서,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이미 여행을 떠나며 바라던 거의 모든 것을 여행 4 일차에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사흘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고 무엇을 경험하든 선물처럼 받아들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이후의 일정 역시 완벽했다. 또 다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콜로멘스코예 성당(Коломенское), 냉전 시대에 활용되었던 지하 18층 깊이의 제42벙커, 프로코피예프의 생가에서 보았던 자필 악보들, 모스크바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던 유람선 투어 등등. 하루하루가 나에게 선물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이곳에서 다 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여행이 무척이나 즐거웠다는 사실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러시아 특유의 업무 속도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출국 시간을 간신히 맞춘 마지막 날 마저도. 매 순간이 강렬한 추억으로 남을 일주일간의 여행이, 그리고 짧아서 아쉬운 방학이 그렇게 끝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