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마당]

서점에 가다

이서현 학생(의학과 4학년)

서점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책을 잘 사지는 않는다.

서점에 가면 책을 읽는 시간보다 고르는 시간이 몇 배로 길다. 두 시간 있어도 정작 책은 십 분 정도 뒤적거리다 덮어 둔다. 그전까지는 빼곡히 쌓인 책을 보며 어떤 게 재미있을지 고민한다.

이같은 탐색을 통해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는 것을 ‘좋은 안목’이라 한다면, 나는 지독히도 안목이 좋지 못하다. 재밌어 보인 책들의 팔십 프로는 그저 그랬고, 정작 내 마음을 울린 책들은 무심코 집어 든 것들이었다.

그렇게 찾아낸, 무섭도록 몰입할 만큼 재미있는 책이 끝나면 마음이 아프다. 새로 다시 찾아 나설 생각에 까마득하다. 또 어디를 가야 이런 책을 찾을 수 있을까. 책장을 뒤지는 지리멸렬한 과정들을 다시금 거쳐야 하는 것이다. 패션이나 음악처럼 독서도 취향을 타기에 누군가의 추천이나 입소문만으로는 책을 찾기 어려운 듯하다. 아무 책이나 사면 되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서도, 손에 집히는 대로 턱턱 사기엔 설명할 수 없는 나만의 아주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다.

물론 진정한 애독가라면 책 안 글씨의 밀도에 관계없이, 오로지 책의 작품성만을 보고 책을 사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소득 0원의 가난한 학생인 나는 같은 값이라면 다홍치마다, 하며 최대한 글씨가 꾹꾹 눌러 담긴, 그러면서도 나를 매료시킬, 책이 너덜해질 정도로 몇 번이나 돌려 보게 될 만큼 멋진 책을 사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쯤 읽었으면 ‘그게 쉽냐’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실제로 아주 어렵기에 내게 서점에서 책을 사 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먹을 것과 옷에는 망설임 없이 돈을 써대면서 책 앞에서만 왜 이렇게 신중하고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하게 되는지 참 모를 노릇이다. 아무튼 그렇게 사지도 않 책만 뒤적거리다 서점을 나온다. 안목이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책을 고르는 과정마저 독서다, 라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없었다면 시간 낭비라 생각할 뻔했다.

그러한 소비 생활에 예외가 생기는 경우가 여행으로 간 곳에서 서점을 들를 때이다.

미지의 세상이라는 신비함과 어디 들르면 기념품을 반드시 쟁취하고야 마는 맥시멀함이 합쳐져 여행지에서는 홀린 듯 책 앞에서 지갑을 열게 된다. 게다가 그토록 굳건히 지켜 온 ‘좋은 책을 고르는 나만의 논리’는 완전히 무시한 채 글도 모르는 낯선 언어에다 그림으로만 가득한, 내 식대로 보 -가성비 떨어지는- 책을 사게 된다. 아무래도 여행의 설렘과 들뜨는 마음 앞에서는 뭐든 속절없나 보다.

이런 ‘가성비 최하 도서’ 구입의 첫 시작은 미국 맨해튼의 한 서점이었다. 서점의 자세한 위치나 모습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작은 그림책 한 권을 샀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다녀온 지 십 년이 훨씬 넘어 그때 뉴욕의 모습들은 거의 잊혀졌지만, 책을 보면 그때의 미국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때부터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서점 방문을 반드시 계획하고 떠나게 되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책을 질리지 않고 오래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일까.

그렇게 시작된 해외 책방 들르기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첫째로 - 반드시 그 나라의 원어여야 할 것. 이거야말로 ‘읽히기 위한’ 책의 본질 상실이겠지만, 어쨌거나 해외에서 한국어 책을 찾기가 더 힘든 것일 테니까.

둘째로 - 그 나라의 문화적 내용을 담아야 할 것. 사실 해외 책방의 책은 여행 기념품의 역할도 해 주어야 하니 적절한 역할 수행을 위해서는 적당한 로컬함과 적당한 희소성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 일러스트 북이여야 할 것. 읽지도 못할 글만 빼곡하면 한국어만 유창한 내가 읽기엔 무리일 테니 다섯 살도 이해할 수준의 그림이 필요하다.

물론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책을 찾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스페인에 가서 스페인 일러스트북을,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신화 책을 살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본 47도 지도책을 샀다. 각 도의 자세한 특산물까지 모두 손그림으로 그려진 총천연 일러스트북이었는데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그렇지만 그 책만한 게 없었다. 결국 안 그래도 가난하게 떠난 후쿠오카 여행에서 그 책 말고는 아무것도 사오지 못했었다.

어쨌거나 억겁의 시간과 돈을 투자한 만큼 그들은 여행의 기억을 선명히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지나도 활자와 그림은 변하지 않는다. 사이에 끼워 놓은 각종 티켓과 서점 영수증은 덤으로 따라오는 추억이다. 그런 불변함과 영원을 사온 것이라 생각하면 무거운 캐리어와 비싼 가격은 금세 잊힌다. 그러니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는 있는 셈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 모든 책들은, 사실 번역기의 힘으로 무사히 읽어낼 수 있다. 파파고 만세!

비단 해외뿐 아니라, 국내 여행에서도 로컬 책방 들르기는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해외에선 시간과 장소의 한계로 대형 브랜드 서점을 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있는지도 몰랐던 동네의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닐 수 있으니 더더욱 그것만의 재미가 있다.

그렇게 들르는 동네 책방에서는, 뭐랄까 카페처럼 책방 주인의 성향이 그대로 묻어난다. 자기 동네를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로컬 작가들의 책을 제일 앞에 전시해 둔다. 취향도 그대로 묻어나서, 지독한 문학편독자들은 서점에 문학책만 빼곡히 쌓아 둔다(신기하게도 책방 경영자의 대부분이 그러한 것 같았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책방을 경영하는 데에 어떠한 경향성이 있는 걸까?). 색채에 민감한 사람들은 장르보다는 색깔에 치중한 채 책을 진열해 둔다. 귀를 열어두고도 책을 읽을 수 있는 대단한 집중력의 사람들은 방을 가득 채우는 클래식을 틀어 둔다.

책방지기라는 꿈이 있어 그런가, 그런 서점을 갈 때마다 나만의 서점에 데려올 요소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카페 사장을 꿈꾸는 이들이 온갖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끔 생각해 본다. 내가 여는 서점의 모습은 어떨까. 나는 뭘 들으면서 활자를 읽을 수 없는 병이 있으니 음악은 절대 안 된다. 신문도 세 개 정도 구독해야지. 무엇보다 나처럼 좋은 책을 찾아 떠도는 누군가들을 위해 책표지가 잘 보이는 방향으로 책을 둘 것이다(색이 바래지 않도록, 그곳은 그늘져야만 하겠다). 영감의 원천이 된 서점들에게 미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모든 것이 작은 스마트폰 안에서 돌아가는 21세기 사회에서, 굳이 책방을 찾아가고 종이책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곳에서도 모두가 다른 기억을, 다른 책을 가져 나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책방의 매력 아닐까. 가장 최근에 들른 춘천의 한 책방 입구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책을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인데 한 줄을 읽고 또 그 다음 줄을 읽는다는 것은 멸종 위기의 도전이 아닐까 (화이팅)

지도 없이 보물찾기를 나선 탐험가들이여 구석구석 천천히 살펴봐 주시고 (…)’

이곳에서 내가 지금껏 해 왔던 것에 대한 멋진 표현을 얻게 되었다. ‘재미있는’ 책을 찾아다니는 내가 지도 없이 보물찾기에 나선 탐험가라니. 게다가 나는 멸종 위기의 도전도 하고 있었다! 멸종 위기라니, 그런 거대한 표현을 여기 써도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갑자기 비좁은 책장 사이에 껴서 책을 뒤적거리는 게 어떤 거대한 세상을 구하는 일과 같이 느껴졌다.

크고 작은 서점의 형태와 스치는 사람들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 모두 멸종 위기의 도전을 해 나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모두 각자의 황금을 찾아 각자의 책방을 열심히 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어딘가에서 열심히 서점을 돌아다니고 있을 수천 명의 탐험가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언제나 열려 있을 우리의 보물섬이 계속되길 진정 바란다. 시대의 파도를 거꾸로 타는 우리 모두가 보물을 잔뜩 찾아낼 때까지 말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