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마당]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의학과 3학년 유태웅, 최수연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하듯, 인터넷은 몇 분짜리 짧은 영상으로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그 짧은 영상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다른 영상을 우리에게 추천해 주며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간다. 이런 풍조 속에서 하나의 미술작품을 진득하게 감상하는 것은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작품을 감상할 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은 느리지만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번 시간에는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drich, 1774~1840)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캔버스 유채,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를 함께 감상하며 소감을 나누고자 한다. 고전주의적 규범에서 탈피하고자 등장한 낭만주의 사조는 이전 시대가 지향한 신화나 도덕 규범의 시각화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자연을 작품 속에 담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화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작품 속에 담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 역시 압도적인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그 자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제복 차림의 방랑자가 대비된다. 이러한 작품의 배경, 구도 그리고 작품 자체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생각하며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감상, 첫 번째]

이 작품을 보며 나는 방랑자에게 나의 시선을 투영해 보았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압도적이다. 안개가 마치 바다를 이루어 가야 할 길을 모두 가리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나는 내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기존 상식과 다른 미지의 세계가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의 단계에 들어선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부정하거나 경외하며, 기존의 세계와의 융합을 거부한다. 하지만 안개 바다가 다가오듯 밀려오는 새로운 세계는 내가 막을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그럴 때 나는 두려워한다. 미지의 것은 반사적으로 교감신경을 활성화시키고 불안하게 만들며, 불안은 흥미로 승화되거나 회피로 이어지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문득 머리로 이해하는 ‘이해’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미지가 주는 두려움은 어느덧 수그러들게 되고, 새로운 세계가 기존 세계에 융화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아, 한 번만 더 보면 확실히 이해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다시 방랑자의 시선으로 돌아오면 두렵기만 했던 안개 바다는 그 속에 길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비록 지금은 그 길이 보이지는 않지만 의식적으로 길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해’와 ‘납득’ 사이에는 또 다른 간격이 있다. 분명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그 길로 내가 가야 한다는 것은 쉬이 납득되지 않는 경험이다. 방랑자는 스스로 길을 나서 안개 바다 앞까지 도착했다. 그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 눈 앞의 안개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가슴으로 이해하는 ‘납득’의 단계에 접어들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이해하고, 의심하게 되는 굴레를 돌게 된다.

바위와 같은 굳은 의지를 모래알처럼 부서뜨리는 것은 망치와 정과 같은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의심이라는 작은 구멍이다. 방랑자는 스스로 선택하여 길을 나섰지만, 의심을 품게 되고 이것이 정말 내가 가야하는 길인 지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납득’하게 된다면 그제서야 안개 바다 속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된다.

스스로 내딛은 길은 이전까지 눈으로 본 것과 다른 풍경을 제시한다. 기존 세계와는 다른 새롭고 더 풍요로운 감정을 부여하며, 매 순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보를 주입 당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기존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들어와 내가 가지고 있던 상식을 왜곡시키거나 혹은, 상식과 일치하다 느끼는 순간 몸 전체로 전율하는 ‘공명’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결국 새롭다고 표현한 세계는 나의 세계가 되어 더 넓어진 기존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나는 안개 바다 속의 방랑자를 통해 조우하게 될 새로운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이 정답이나 오답이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 저마다 다른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왜 예술을 감상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단순한 미적 아름다움, 감상하는 시간의 여유, 풍조나 기법에 대한 지식의 습득 등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세계선을 넓히기 위해서’ 라는 이유를 더하고자 한다. 예술은 화가가 창조한 세계, 작품 스스로가 가진 세계, 감상자가 수용하는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 감상자가 아무리 화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해도 화가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설령 완전히 파악한다고 해도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는 다른 인상을 감상자에게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작품이라고 할 지라도 감상자에 따라 느끼게 되는 인상은 서로 다를 것이다. 결국 감상자는 감상하는 본인의 세계 밖에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예술을 통해 이 서로 다른 세계가 작품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전율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가 서로 작품을 통해 통할 지도 모른다는 그 설렘이다.


[감상, 두 번째]

어떤 이는 이 그림을 보고 광활하고 웅장한 자연 앞에 선 위태로운 인간을 그려냈다고 평하였고, 또 다른 이는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고자 하는 투쟁의 의지를 느꼈다고 말하였다. 한 폭의 그림을 진득하게 바라보다 보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 연결되는 문들로 가득한 공간에 초대된 느낌을 받는다. 자칫하면 미지의 세계로 다가와 나에게 ‘오해’가 되었을 타인의 삶이, 그림이라는 초대장을 매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작품을 감상한다는 뜻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나의 문을, 그 뒤에 있을 나의 공간을 정돈하는 과정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학업에 쫓기고 일에 치여 흐르는 대로 살아왔던 삶이었어도, 작품에 삶을 투영함으로써 흘러간 시간들을 다시 걸어보고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다. 타인의 세계만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나의 세계를 깨닫는 순간도 나를 고동치게 만든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왠지 모를 허탈함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안개 바다에 파묻힌 산봉우리와 산맥에 숭고함을 느꼈을 수도 있고, 꼿꼿하게 서 있는 제복 차림의 남자에게서 인간의 의지를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왜 봉우리에 서 있는지, 그리고 왜 고독하게 안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가 산맥의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걸어왔던 길을, 무심하고도 차가운 안개 바다가 지워버린 것만 같았다. 이상을 좇아 시작했던 길이자 묵묵히 걸어온 길이었는데, 뒤돌아보니 남은 건 흐릿해진 기억밖에 없는 현실에 쓸쓸해하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누구든 자신이 정한 삶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만을 바라보며 계획을 세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 때문에,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주위에서 만드는 물살에 떠밀려 살다 보면 본인의 이상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본인이 정한 삶의 목표가 가장 중요할 수는 있어도 삶은 그것만으로 구성되지는 않기에, 주어진 역할들에 충실히 살다 보면 분명 이룰 수 있는 목표들이 있고, 성취감도, 삶의 가치도 느낄 수 있다. 다만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을 때, 충실하게 살았던 삶이었음에도 진정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에 대한 회의가 찾아온다.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모든 시간을 투자하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노력했던 일들도 기억 너머로 사라져 봉우리 위에 서 있는 나를 더 고독하게 만들 뿐이다. 마치 나의 삶에서 방랑자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TV에 나오는 수많은 위인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보이는 삶, 나마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발자취. 그렇다면 이런 삶은 잘못된 삶인가. 안개 바다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이제는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것일까. 솔직히 말한다면, 삶의 본질은 무엇인지, 가치 있는 삶은 어떤 삶인지는 평생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산맥의 정상에서 과거를 쓸쓸하지만 담담히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 그건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 쉬기만 해서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억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을 만큼의 시간들을 무사히 버텨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고, 삶의 목표를 고민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내딛었던 발걸음을 담은 봉우리들이 안개 바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아진다면 조금은 가치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마치 끝없는 어둠 속에서도 별들이 하늘을 밝히듯이 말이다.


‘왜 미술을 좋아하는가’를 한 마디로 답해보라고 묻는다면, 나는 ‘위로’를 받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나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후회가 되는 순간들에, 그림은 내게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격려해준다. 한 명의 화가가 자신을 쏟아 그려낸 그림에 나의 삶과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느끼며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바쁜 삶에서 잠시 하나의 작품을 진득하게 감상하며 나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이 순간이 내 삶의 봉우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무리하며]

하나의 작품을 두고, 한 학생은 작품 감상을 통해 넓어지는 세계선에 대해 논하였고, 다른 학생은 흘러가는 시간 속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였다. 작품이 작가의 삶을 반영하듯이, 작품의 해석에는 감상자의 삶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감상에 정답이나 오답은 없지만, 감상자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면 감상자의 해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호불호를 떠나, 하나의 작품에 대해 고심하고 담담하게 써내려 간 우리의 글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색다른 기회가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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