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마당]

의학의 길, 그 시작점에 서다

의학과 3학년 최수연



2022년 2월 21일, 저는 이제 병원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이번에는 환자가 아닌 의사의 입장으로, 지식을 배우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가운을 입고 환자들을 만나러 갑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색하기만 하고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다른 학과의 또래 친구들이 졸업 시즌이 되어 사회인으로서 준비를 해 나갈 때, 저는 여전히 강의록을 보며 공부만 하는 학생으로 살았습니다. 단어만 의학과 “3학년”이지 실제로는 대학에 재학한지 5년차가 되었으나, 마음가짐은 마치 대학교 3학년 학생에 가까웠습니다. 미숙하고 어리게만 느껴지는 제가 막상 병원 실습을 나간다고 하니, 과연 혜화에서의 2년은 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COVID-19가 휩쓸어 간 지난 2년은 분명 저희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었습니다. 연건 캠퍼스에서 교수님들께 수업을 들으며, 동기들과 모르는 내용에 대해 서로 질문하고 함께 공부해야 할 시기에 타인과의 만남이 갑작스레 끊어졌습니다. 학교에서는 대부분의 대면 수업이 취소되었으며 동아리 활동이 금지되었고, 학생들은 타인과의 만남을 스스로 거부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해부학, 생화학, 생리학 등 쏟아지는 지식들 속에서 저희는 함께 공부하기보다는 현실에서 고립되어 홀로 싸운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외로워졌고, 동시에 서로에게 조금은 무관심해졌고, 그리고 여러 친구들이 휴학하는 걸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흘렀고 지식은 늘었으며 추억은 쌓였습니다. COVID-19로 대면 수업들이 동영상 강의로 대체되면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쏟아지는 몇 천장의 PPT 슬라이드 속에서도 밤낮없이 공부하며 버티다 보면 무사히 시험이라는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방학에는 교수님들 연구실에 인턴으로 들어가 실제 연구가 무엇인지 배우며 진로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특히 연구활동과 관련하여서는, 2학년 2학기 10월부터 진행되었던 의학연구2 기간이 인상깊었습니다. 처음 주제 잡는 것부터 결과를 분석하고 논문을 쓰기까지, 관심 있는 주제를 깊이 있게 파고들며 저의 생각을 진전시켰던 경험은 훗날 다시 연구를 하게 될 때 탄탄한 밑바탕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동기들과 잊지 못할 추억도 만들었습니다. 해부학 시간, 생애 첫 카데바 해부를 하며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탱해주었던 고마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한 번은 시험 전날 새벽에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갑자기 폭우가 오는 바람에 온통 젖어서 기숙사로 급히 돌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기숙사 룸메이트와 같이 공부를 하면서, 강의록에 모르는 점들을 노란 포스트잇에 적어 하나씩 벽에 붙이다가 벽 전체가 노랗게 변해버리기도 했습니다. 비록 코로나가 삶을 잿빛으로 만들어 버렸을 지는 몰라도, 저희는 그 위에서 세차게 붓질을 하면서 저희만의 2년을 그려 넣고자 했습니다.

저에게 있어 지난 2년은 COVID-19를 극복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의대에 들어온 이유를 되찾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배우고 배워도 끝이 없는 의학 공부를 하다 보면, 제가 배우는 지식이 환자들의 삶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외우기만 하는 제 자신을 자주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지식이 범람하는 강가에서 배움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세찬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만 하는 통나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고 없이 찾아왔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2학년 1학기에 임상 증례를 다루는 CBL (Case-based learning)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복습을 하던 도중, “내가 열심히 배우고 공부하면 누군가를 살릴 수 있겠구나, 언젠가는 살고 싶어 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체를 글로만, 그림으로만 배우다가 어느 순간 저의 배움이 현실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손끝에 찾아온 활기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결심하였습니다. 아무리 지식의 홍수에 숨막혀 주위를 둘러보기 힘들어진다고 하여도, 내가 붙잡고 매달리며 뛰어들어야 할 대상은 각각의 색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 세상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숲이라는 점을. 의과대학에 지원했던 고등학생의 제가 가졌던 꿈이 희미해지고 있을 때 저의 미래를 다시 한 번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의과대학에 온지 벌써 5년째가 되었습니다. 첫 2년은 관악 캠퍼스에서 인문대, 자연대, 사범대 등 온갖 학과를 둘러보며 세상의 다양한 지식을 접했고, 그 다음 2년은 연건 캠퍼스에서 의학만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진정한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병원 실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실습에 기대도 크지만, 이전과는 다른 생소한 커리큘럼에 불안함과 걱정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저희는 COVID-19로 인해 대부분의 수업을 비대면으로 들어야 했던 첫 번째 학년이었습니다. COVID-19 속에서 소극적이어야 했고 움츠러들었던 저희가 역동적인 사회 속으로 발을 내딛으려 합니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실수도 많이 하겠지만, 교수님들께서 가르쳐 주셨던 의사의 마음가짐, 동기들과 함께 다졌던 의지를 잊지 않으며 활기차게 첫 스타트를 끊어보고자 합니다. 쉬운 길은 절대 아니겠지만,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분들을 기억하며 의사의 길을 당당히 걸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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