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마당]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2021년 의예인 독서일기 공모전」 개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이정표 학과장)에서는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 함양을 위해 비교과 과정 필수 수료요건으로 독서일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지속적인 독서와 글쓰기를 장려할 뿐 아니라 학생과 지도교수님 간 원활한 소통의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다.  

올 한 해의 좋은 독서일기를 학우들과 공유하고 올바른 독서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취지로, 지난 2021년 11월 15일(월)부터 12월 2일(목)까지 「2021년 의예인 독서일기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올해는 총 16건이 접수되어 최우수상으로 ‘부조리에 대하여 -『페스트(알베르 카뮈)』를 읽고’(의예과 1학년 정연우 학생)가 선정되었고, 우수상으로 ‘개천에서 용 안 난다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를 읽고’(의예과 2학년 최지혁 학생), 장려상으로 ‘《인간의 굴레에서》로 본 인생의 의미 -『인간의 굴레에서(서머싯 몸)』를 읽고’(의예과 2학년 안영준 학생)가 선정되었다. 

 

 

<최우수상>
부조리에 대하여 -『페스트(알베르 카뮈)』를 읽고

2021-12022 정연우 (의예과) 

 

《페스트》는 《이방인》의 속편이라고도 하는데, 같은 주제를 더 나은 방법으로 말하는 듯하다. 카뮈는 본래 《이방인》에서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만드는, 사회적 관습의 부조리를 말하려 했으리라 생각된다.

《이방인》 2부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뫼르소가 어머니에 대한 예우가 부족해 이상한 사람이라고 결론짓는 ‘관습’을 떠나, 1부 6장 살인 사건의 정확한 경과와 뫼르소의 동기, 피해자 같은 ‘실존’에 더 신경 썼어야 할 것이다. 뫼르소는 ‘비정상이어서’가 아니라, ‘살인을 저질러서’ 처벌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무미건조한 문체와 범죄의 영역에 걸친 플롯 때문인지, 독자에게 자성을 유발하기보다는 답답함만 자극하였을 듯하다. 한편 《페스트》에서는 부조리가 여러 인물의 관점에서 조망되고, 살인 사건보다는 훨씬 ‘합리적’인 전염병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이방인》에서 주제 의식을 담은 재판 장면은 살인 사건의 긴장감에 묻히기 마련인데, 《페스트》에서는 소설 전체에서 카뮈의 실존주의가 여실히 느껴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마지막에 나오는 리외(Rieux)의 독백이다. 페스트가 잠잠해지고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자유’를 만끽할 때, 리외는 ‘페스트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조용히, 음산하게 되뇐다. 물론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보다 주제 의식에 입각하고 싶다.

《페스트》가 전염병에 대항하는 오랑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여기서 전염병은 상징적 소재이자 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을 억압하는 무언가가 가시적으로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부조리’로 칭하고 벗어나려 애쓴다. 일부는 부조리로부터 도피하고, 일부는 종교로 귀의하며, 일부는 자살하고, 일부는 현실을 인정한 후 ‘반항’한다. (카뮈는 반항이야말로 가장 좋은 대응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부조리가 없어지면 그들은 성공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과연 페스트는 없어진 것일까?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가 아니라 부조리로서의 페스트 말이다. 과연 오랑 시의 부조리는 없어진 것일까? 잘 모르겠다. 오히려 리외의 독백은 그렇지 않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다. 부조리는 사실 페스트의 창궐로 ‘생겨나지도’, 전염병의 소강으로 ‘사라지지도’ 않았다. 부조리는 늘상 존재했다. 그것이 페스트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잠들었을 뿐이다. 부조리는 늘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자신이 부조리와 얽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본질적으로 죽음이라는 삶의 부조리, 규율이라는 사회의 부조리에 얽매였을 것이다. 또 부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조차 또 하나의 부조리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조리를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부조리에 너무 오래 길들었기 때문이다. 침묵(acquiesce)하는 그들은 부조리를 인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당연히 벗어나지도 못한다. 페스트가 문제가 아니라, 삶이 문제이다.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도피할 것인가, 종교로 귀의할 것인가, 자살할 것인가, 아니면 반항할 것인가? 카뮈는 독자에게 그것이 문제라고, 삶을 직시하라고 역설한다.

김현의 비평문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문학은 억압하지 않기 때문에 억압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이 말은 《페스트》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전염병은 독자를 억압하지 않는, 가상 도시에 설정된 가상 상황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염병 속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며 자신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자신은 부조리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아니, 자유롭지 않다. 부조리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며, 독자의 눈에 소설 속 페스트처럼 두드러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소설에 녹아 있는 카뮈의 답은, 어쩌면 회복탄력성(resilience) 담론과 맥락이 통하는 것도 같다.

부조리한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 가장 좋은 대응 방식은 1) 그 현실을 인정하고 2) 직면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 3) 행동, 즉 반항하는 것이다. 우선 어떤 사회적, 도덕적 가치나 관습, 본질에도 얽매이지 않고, 부조리의 실존을 직면해야 한다. 그런 다음 부조리의 실존 속에서 최대한 반항하기 시작하면, 가장 진취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느새 자신의 삶은 ‘그 부조리에 반항하는 삶’으로서, 세상에 유일무이한 소중함을 갖기 때문이다.

《이방인》과 《페스트》에서 은연중 드러나는 핵심 부조리는 삶의 반대인 ‘죽음’이다. 뫼르소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운명에 굴복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닥쳐오는 죽음을 바라본다. 오랑 시의 시민들은 페스트와 그 전염병이 몰고 오는 죽음에 시달린다. 이제 죽음을 위 문단에 대입하면,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지하는 것이며, 그에 반항하는 자아를 확립함은 곧 삶의 목표를 가짐을 의미한다. 죽음뿐이 아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혹은 인지하지 못하는 부조리의 총체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부조리는 삶에서 필수 불가결하며 없어지지 않는다. 부조리를 인정하고, 직면하고, 그 속에서 반항해야 하는 이유이다. 반항을 계속하다 보면, 가장 큰 부조리인 죽음과 직면하는 삶의 마지막 순간은, 부조리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우수상>
개천에서 용 안 난다 -『세습 중산층 사회(조귀동)』를 읽고

2020-11107 최지혁 (의예과) 

 

요즘 베스트셀러 도서들은 하나같이 “못해도 괜찮아”, “힘들면 쉬어도 돼”와 같은 말을 건넨다. 예전의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죽도록 노력하고 원하는 바를 이뤄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을 보고 일부 기성세대들은 요즘 젊은이들은 의지가 없다며 비난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청년들이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노력을 해도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재능과 노력에 걸맞게 성취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

이삼십 년 전 20대였던 오늘날의 기성 세대들과는 달리, 오늘날의 20대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20대들은 극복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에 직면하였다. 도서 《세습 중산층 사회》는 이러한 오늘날의 20대가 겪는 불평등을 소개한다. 저자는 전문가의 의견과 각종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20대들만이 특수하게 겪는 불평등의 세습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20대로서, 오늘날의 20대가 겪는 불평등의 세습이라는 문구가 나의 이목을 끌었고 공감을 불렀다. 그동안 살아가면서 절감한 불평등이 무엇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저자는 책의 초반부에서, 오늘날의 20대가 진입하는 노동시장을 설명한다. 20대가 진입하는 오늘날의 노동시장에 대하여,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 등의 ‘내부자’와 중소기업 재직자나 비정규직 등의 ‘외부자’로 이동하기 힘든 계층이 존재함을 말한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전문가의 의견과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적절히 뒷받침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노동시장에서는 첫 진입이 매우 중요하므로, 부모들은 자녀의 학력에 치열하게 투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소득 10분위의 소득이 감소됨을 보여주는 자료를 바탕으로 ‘괜찮은 일자리’라고 말하는 내부자 노동시장 자체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학력이라는 출입증이 요구된다. 이는 현재 20대가 겪는 노동시장을 잘 반영하며 흔히 접할 수 있는 상식과도 들어맞는 통찰로 볼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20대의 노동시장의 특징을 바탕으로, 60년대 생 부모 세대에서부터 이어지는 불평등의 세습을 전개한다. 20대의 고학력 비율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올라갈수록 오르는 경향을 보인다. 당시 고용 불안정을 겪은 부모 세대들은 자녀가 본인들과 같은 노동 시장의 지위를 물려받는 길은 전문직뿐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전문직과 대학 진학에 부모들이 사활을 건 투자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저자는 학력과 노동시장의 진입에서 더 나아가, 취업 이후의 삶에서 직면하는 불평등에 대하여 논한다. 16개의 선진국에서의 투자자산 수익률을 비교 분석한 결과를 통하여 자산 수익률이 평균 GDP 성장률을 계속해서 앞질렀다는 결과를 내세운다. 이를 통해 무주택자 부모 밑에서 자란 20대들은 높은 노동 지위를 얻더라도 근로 소득만으로는 계층 이동이 힘들며, 부동산의 상속에 의해 20대들이 겪는 불평등을 그 무엇보다도 키운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기회의 평등과 사회적 최소 수준의 합의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첫 번째로 수준 높은 교육의 기회와 능력 배양의 기회에서, 하위 90퍼센트의 계층 또한 상위 10퍼센트 수준의 기회를 갖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두 번째로는 노동시장의 변화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부조해야 함을 주장한다. 끝내 제시된 해결책은, 앞서 20대가 겪는 전무한 불평등에 대하여 주장한 바와 구체적인 통계 자료에 비해 터무니없이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다. 제도적인 차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회의 제도를 개혁하는 계층은 이미 불평등을 자녀들에게 세습하는 세습 중산층들이다. 이들의 대다수가 그들이 가진 세습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리 없다. 이 책은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전문가의 말과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 20대들이 겪는 불평등의 실태를 현실적으로 고발한다. 저자는 이 책의 독자들에게 20대들에게 닥친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 불평등의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에 부족했다.

오늘날의 20대들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직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불평등은 누군가에게는 평생 인식하지도 못할 당연한 권리로, 누군가에게는 평생 극복할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불평등은 인간 사회가 지속되는 한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절한 수준의 불평등은 불평등의 혜택을 받는 집단에게는 그 혜택을 지속하기 위한 발전의 계기로, 불평등의 피해를 받는 집단에게는 선의의 경쟁을 위한 발전의 계기로 작용한다. 이는 적절한 수준의 불평등이 사회에 올바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잉되어 사회와 집단에 대한 혐오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마땅한 노력을 폄하하는 명분이나 노력조차 하지 않을 핑계가 되어서도 안된다. 능력이 있고 노력이 있다면 뭐든 된다는 이상적인 말로 결론 짓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불평등 세습의 족쇄를 이겨내고 노력에 걸맞는 혜택을 누리는 집단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 책이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살아가는 20대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이면서도 유용한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다.

 

 

<장려상>
《인간의 굴레에서》로 본 인생의 의미 -『인간의 굴레에서(서머싯 몸)』를 읽고

2020-19895 안영준 (의예과)

 

서머셋 몸은 정말 탁월한 소설가이다. 그를 처음 마주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우연히 교과서에서 그의 대표작인 '달과 6펜스'를 접하고 나서부터였다. 수업시간에 그 책을 다루지 않았음에도 내용이 궁금했던 나는 안정적인 직업과 가족을 모두 내팽개치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완성하고자 했던 사람의 삶을 관찰하면서 인간 심리에 대한 탐구욕이 솟았었다. 공부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몸의 작품을 여유 있게 읽을 기회는 없었지만 단편 몇 가지를 읽었고 그를 통해 그가 다양한 인간의 성격적 특징들을 예리하게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녔음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중반을 주로 살았던 사람이어서 그의 소설의 배경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영국, 유럽 대륙, 미국, 각종 식민지(중국, 인도, 열대 섬 등)이다. 현대인들이 책을 접할 때 이러한 배경이 진입장벽을 조금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요소들이 많았다. 또 다른 고전과는 달리 문체가 어렵지 않아서 빠르게 읽혔다.

작가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는 몸이 자신의 유년 및 청년 시절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한쪽 다리가 불구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태어난 필립이라는 소년이 부모님을 여의고 백부 밑으로 들어가 자라면서 성장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총 500쪽 정도 분량의 책이 2권이나 되어 처음에는 읽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읽다 보니 필립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하게 되어 후반부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더군다나 주인공 필립이 의대생 신분으로 실습을 나가고 의사면허를 딴 후 부임지에 발령 받아 환자들을 진료하는 모습에 미래 내가 의사로서 환자들을 마주하는 모습이 겹쳐 보여서 기억에 남았다.

필립의 성장 과정은 그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삶을 구속하는 일련의 굴레들을 차례로 벗어 던지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종교의 굴레, 윤리의 굴레, 사랑의 굴레, 나중에는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굴레까지. 이렇게 여러 굴레들을 벗고 성장하게 된 데에는 그가 살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는데, 그들 각각이 삶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완고한 태도를 지니면서도 속물적인 면을 드러내기도 하는 백부부터 계속해서 술에 절며 쾌락을 추구하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름의 지혜를 갖춘 크론쇼 노인이나 변호사시험에 낙방한 자신의 실패를 회피하기 위해 ‘아름다움’(또는 멋)에 집착하는 헤이워드,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여 필립에게 수차례 기대감과 절망감을 안겨 주는 밀드레드, 필립이 어려울 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를 챙겨 준 애설니 부부 등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배울 점이 있는 인물들이 정말 많다. 젊은 나이에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저자의 경험의 폭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을 새삼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경험을 하지 않고서도 책을 통해 간접경험으로 배울 수 있게 되어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결말부로 필립이 그동안 자신의 겪었던 경험들을 토대로 삶에 정해진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부분이었다. 주인공이 ‘굴레’를 벗어 던지면서 성장한 만큼 납득이 가지 않는 결말은 아니었으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처음에는 정말 허무하게 다가왔었다. 의미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러나 책을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자는 단순히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것 같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굳이 삶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기보다는, 의미가 정해져 있다고 판단하고 그 의미를 강박적으로 좇는 삶을 경계하라는 뜻이 《인간의 굴레에서》의 진정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예시로 작중 등장인물인 ‘크론쇼 노인’은 필립에게 페르시아 양탄자를 주면서 그 속에 인생이 들어있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필립은 나중에 가서 살아가는 일이 양탄자 속에 원하는 대로 무늬를 만들어가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비유를 양탄자 무늬가 만드는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듯이 인생 역시 살아가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낼 수 있고, 어느 것도 ‘옳은’ 무늬라고 보기는 어렵듯이 어느 인생도 다른 인생보다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과연 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까? 아니면 필립처럼 인생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아야만 할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사실 나는 인생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저 들어오는 지식이나 경험을 접하고 인생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나 역시 필립처럼 인생의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면 조금 허무하기야 하겠지만 그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깨달음을 얻었을 때쯤이면 살 만큼 살아서 양탄자 무늬 정도는 기꺼이 짤 수 있을 테니까.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