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협 명예교수(서울대학교의과대학 영상의학교실)
32년 동안의 서울대학교의과대학과 병원에서 비뇨생식기영상의학 교수생활을 마무리하고 K-영상클리닉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영상의학과 의사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혼돈에 빠졌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도 많이 줄었으며 세계초음파의학회 회장으로서의 해외 일정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어서 조금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지난 6-7개월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서울의대 학장님과 함춘인사이드 편집장님께 감사 드립니다.
정년 후에 인생 2막으로 K-영상클리닉을 계획한 것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김성권 선배님은 같은 콩팥 분야의 일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워낙 잘 알고 있고 좋아하고 따르던 선배님입니다. 김 선배께서 6년 전 정년 후에 바로 명륜동에 서울K내과를 개원했을 때 많은 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후 김 선배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저에게 정년 후에 다른 생각하지 말고 함께 일하자는 말씀을 하시곤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생각했지만 정년이 가까워 오면서 깊이 생각할수록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굳어졌고 늘 그래왔듯이 이 또한 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축복으로 여기면서 정년 후 인생 2막을 김 선배님의 서울K내과에서 시작했습니다.
명륜동 서울K내과 3층에는 김 선배의 진료실 맞은 쪽에 내 진료실인 K-영상클리닉이 있습니다. 김 선배께서는 아침 7시부터 진료를 시작해서 모든 진료를 오전 중에 마칩니다. 오전 중에 김 선배의 환자 중에 10명 정도 초음파 검사를 하고 오후 1시-3시 사이에는 콩팥, 전립선, 자궁, 난소 등의 CT나 MRI를 가지고 상담하기 위해서 방문하는 환자들을 만나고 필요하면 초음파검사로 확인하는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K내과 2층에서는 김 선배의 제자인 강응택 박사가 40개의 투석병상에서 100여명의 만성신부전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 환자들의 초음파진료도 제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수요일 오후에는 제 분야의 전문가가 없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대학병원에서 자문교수로서의 일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영상의학과 의사들이 정년 후에 보통 하는 일 하고는 좀 다른 모습이어서 많은 분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분들께 저는 정년 후 인생 2막을 감사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는 보고를 드립니다.
특별히 감사하는 것은 제목에 있는 호두까기입니다. 호두까기현상 (Nutcracker phenomenon) 또는 호두까기증후군 (Nutcracker syndrome) 이야기입니다. K-영상클리닉에서 최근 6-7개월 동안 만난 호두까기증후군 환자가 32년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본 것보다 훨씬 많으니 내가 왜 호두까기에 빠졌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호두까기증후군은 왼쪽콩팥정맥이 복부대동맥과 상장간막동맥 사이에 심하게 눌려서 혈뇨나 단백뇨 등이 생길 때 붙이는 진단입니다. 눌리는 모양이 호두를 깰 때 사용하는 기구와 비슷해서 붙여진 진단명입니다. 호두까기증후군이 얼마나 흔한지는 잘 모릅니다. 미국에서는 희귀질환으로 등록이 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혈뇨나 단백뇨의 빈도를 감안하면 그 빈도가 꽤 높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K-영상클리닉에서 하루 10명 정도 콩팥 초음파검사를 하는데 호두까기현상이 있는 환자를 한 두 명씩은 꼭 만납니다.
도플러초음파를 이용해서 호두까기증후군을 진단할 수 있다는 연구논문을 Radiology라는 괜찮은 잡지에 쓴 것이 1996년이니까 꽤 오래 되었습니다. 이 전에는 호두까기증후군을 진단하려면 콩팥정맥에 카테터를 직접 넣고 압력을 측정하는 복잡한 시술이 필요했는데 도플러초음파를 이용해서 진단 할 수 있다는 논문은 꽤 획기적이었습니다. 이 후에 이에 관한 다른 논문들이 여러 편 나왔고 이제는 도플러초음파가 가장 적절한 일차 진단법으로 자리 잡혀 있습니다.
정년 후에 좋은 분들과 함께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큰 축복으로 여기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래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호두까기증후군 환자들을 매일 진료하고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혈뇨나 단백뇨로 오랫동안 걱정해오던 환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진단을 해 준다는 것은 큰 보람이고 즐거움입니다. 또 환자들이 호두까기현상의 원리를 잘 이해하도록 설명해 주고 수면 자세를 교정해 보도록 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수면 자세 바꾸는 것 만으로 몇 년간 있던 왼쪽 옆구리 통증이 사라진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도플러초음파를 이용해서 몸 속 깊은 곳의 정맥의 혈류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고 지식, 기술, 경험이 필요합니다. 호두까기에 대해서 그 동안 제가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정년 후에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면서 몇 가지 일들을 준비해 왔습니다. 정년 직전에 마지막으로 쓴 논문이 호두까기 현상과 증후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https://www.kjronline.org/DOIx.php?id=10.3348/kjr.2019.0084). 정년으로 단절된 후배들 교육을 위해서 직접 만든 웹사이트 (www.k-radiology.com)에 호두까기증후군을 포함한 여러 가지 비뇨생식기영상의학분야의 교육자료를 만들어 올려 두었고 계속 업데이트 하는 것도 꽤나 재미 있습니다. 배워서 직접 만든 사이트를 통해서 정년 후에도 후배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어서 정년을 앞둔 다른 분들께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혹시 뜻은 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분들께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을 공유하고 도와드릴 생각이 있으니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호두까기에 빠지다 보니 새로운 것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왼쪽콩팥동맥이 눌리는 것도 단순히 한 가지가 아니고 최소한 세 가지 정도의 서로 다른 형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왼쪽콩팥정맥이 눌리는 정도가 누워 자는 자세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호두까기는 참 재미있는 현상이며 증후군이어서 좀 더 깊이 파 보려고 합니다. 체계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연구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좀 복잡하긴 했지만 ‘호두까기증후군연구소’를 설립했고 홈페이지(https://kimshrad.wixsite.com/rincs)도 만들었습니다. 연구소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연구소를 통해서 호두까기현상과 증후군에 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후배들과 함께 풀어 보려고 합니다.
이상 설명 드린 대로 저는 정년 후 인생 2막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모두 힘든 시기에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