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소개]

연구실소개

함춘인사이드에서는 의과대학에서 활발히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여러 실험실을 소개합니다. 이 코너를 통하여 의과대학의 연구 역량과 그 다양함에 대하여 소개 해 드리고 공동연구의 장을 열어 드리고자 합니다.

<함춘인사이드 연구실 소개>


도영경 교수(의료관리학교실, 의료관리학연구소, ykdo89@snu.ac.kr)

저희 연구실은 의과학관 5층 의료관리학교실에 있습니다. 연구실이라고는 하지만 독립된 연구실이라는 개념이 분명하지 않아 아직 번듯한 연구실 이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매주 금요일 3시에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의료의 관계성과 의학적 의사결정 세미나”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의료의 관계성’이라고 했을까요? 의료를 보는 관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의학 지식과 기술을 환자에게 적용하는 행위가 의료의 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의과대학에서 의학 지식을 습득하고 병원에서 임상 수련을 받는 것은 그런 행위로서의 의료를 예비하는 과정입니다. 다음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거래하고 교환하는 것을 의료를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수가(가격), 의료공급자, 의료소비자 등의 단어들이 자연스러운 것만큼이나, 의료에서 거래와 교환의 은유는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의료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 충분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결여는 오늘날 한국 의료의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 결여는 바로 의료를 관계로 보는 관점입니다.

 

의료를 관계로 본다 함은, 의료를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人間)의 문제로 봄을 말합니다. 위에서 말한 다른 두 가지 관점과 대비하여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관점에서는 의료를 지식과 기술의 담지자인 의사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봅니다. 의사는,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필요한 의학 지식과 기술을 가졌다고 국가가 면허를 부여했기 때문에 의사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의사의 존재론적 본질은 그러한 제도적 장치인 바, 의사는 환자가 있기 전에 이미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을 취하면, 좋은 의료는 의사들이 담지한 지식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가능합니다. 위의 두 번째 관점에서는, 흔히 시장의 교환 관계가 그러하듯 익명의 거래 당사자와 다를 바 없는 의사와 환자가 서비스를 주고받는 것으로 의료를 볼 것입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의사는 의료서비스의 공급자이기 때문에 여기서 좋은 의료는 의료서비스의 공급이 필요 혹은 수요에 맞게 최적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관점과는 달리 의료를 관계로 보는 관점에 선다면, 의사는 어떻게 의사가 되는가, 좋은 의료는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고통을 호소하며 다가오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때 비로소, 또한 그 때마다 매번 새롭게 의사가 됩니다. 즉, 국가가 부여한 면허나 의료서비스의 제공자라는 존재적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좋은 의료는, 고통을 호소하며 다가온 얼굴을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마주하고 그것이 설령 불가능할지라도 치유, 삶, 죽음의 여정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의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위의 세 가지 관점이 모두 중요하지만, 오늘날 한국 의료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데 있어서 관계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좋은 의료를 의사의 자격 조건(이런저런 인증이나 교육 강화를 통한)이나,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와 치료 결과(지표를 이용한 평가나 경제적 인센티브를 통한) 향상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환자와 의사의 관계와 신뢰를 저해하는 요인을 줄이는 방향으로 접근해 보는 것입니다. 나이브하고, 공허하고,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듣기 쉽다는 점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료에서 관계성이 간과된 서비스 공급의 최적화가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그런 서비스의 최적화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좋은 의료를 뜻할까요? 의료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의 문제이자 사회적 수행이라면, 관계성은 간과할 수 없는 관점일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의사나 상품에서 출발하는 은유에 비해, 의료에서 관계성이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 자체가 어쩌면 우리 의료의 관계성의 빈곤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실 소개를 하다가 의료와 의사의 존재론으로 흘렀습니다만, 세미나 제목에 의료의 관계성을 포함한 이유를 해명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료의 관계성 대주제 아래, 환자중심성과 사람중심성, 환자-의사 관계, 환자경험, 의료에 관한 상품 서사, 신뢰, 의료제도와 의사의 마음(심성), 구조와 행위 문제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의료제도는 하나의 구조로서 행위자들의 관계성에 영향을 미치고, 행위자들은 그 구조를 유지, 강화, 변형시킵니다. 현재의 한국 의료는 그런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역사적 결과물이자 동시에 미래를 위한 제약 조건입니다. 하나의 예로서, 아래 그래프는 공적 재정 기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환자와 의사 사이에 직접 돈이 오간다는 것이 환자-의사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본 간단한 분석입니다. 국가 수준에서 전체 의료비 중 본인직접부담(out-of-pocket) 비율이 높을수록, “Doctors care more about their earnings than about their patients” 문장에 동의하는 경향이 높다는 점을 보여줍니다(2018년 보건경제정책학회 가을학술대회 발표). 한국(KR)이 어디에 있는가를 한 번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Data: ISSP and WHO NHA database

세미나 제목에서 의료의 관계성 뒤에 이어지는 것은 ‘의학적 의사결정’입니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의 주요 성격이 의학적 의사결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주제 아래에서는 환자, 의사, 대중매체의 건강통계이해력(statistical health literacy), 의료 분야에서의 위험의사소통(risk communication), 개인과 사회 사이의 의학적 의사결정의 문제(공유자원 문제, 예방의 역설 등), 휴리스틱을 이용한 의학적 의사결정 등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의사와 의과대학 학생 약 600명에 대한 건강통계이해력과 환자경험 사례 평가 조사를 마치고, 다음 단계로 건강통계이해력 향상을 위한 중재연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연구실에는 인지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한 연구원들이 합류하여 문제 중심의 다학제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과 타대학 교수들과의 공동연구도 수행 중이며, 앞으로 협력연구의 범위를 넓혀갈 계획입니다. 의과대학 학생들에게도 연구실 세미나와 연구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진: 의료의 관계성과 의학적 의사결정 세미나 장면(심화선택 과정 의과대학 4학년 학생들과 함께)

연구실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인 주례 세미나는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1시간 반 동안 있습니다. 여기서는 고전과 현대의 이론과 경험 연구 문헌을 두루 읽습니다. 이 세미나는 공개 세미나로서, 누구라도 참석 환영입니다. 연구실 카페(https://cafe.naver.com/snumdm)를 방문하시면 어떤 논문을 읽는지 볼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제게 이메일을 보내시면 메일링 리스트에 올려 매달 말일 전에 다음 달과 그 다음 달 세미나 계획과 논문을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금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4시부터는 “coffee-and-tea”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2016~7년 연구년을 보낸 독일 베를린의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보고 와서 시작한 일인데, 자유롭고 편한 분위기에서 연구실 구성원들이 여유 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좋은 의료는 좋은 관계와 분리될 수 없듯이, 좋은 학문과 좋은 연구 역시 좋은 관계를 떠나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속한 의료관리학교실이 2017년 30주년을 맞아 펴낸 교실사에 쓴 글의 한 조각을 옮기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좋은 학문과 좋은 연구에 대한 저의 요즘 생각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름을 만들어 가는 학문, 지적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흐름 속에서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저력, 오랜 정련과 집단적 축적이 만들어 내는 탁월함, 진입장벽 안에서 안주하지 않고 허구적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학문, 수평적 관계 속에서 좋은 질문과 비판을 자극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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