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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감동: White coat ceremony

의학과3학년 정한별

반복되는 시험으로 인해 언제나 조금은 피곤한 얼굴의 동기들. 2019학년도 White coat ceremony(화이트 코트 세리머니)가 예정되어 있던 2월 15일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날은 <임상의학입문> 과목의 시험일이기도 했기에 학생 의사가 되어 실습 현장에 나아가기로 다짐하는 행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설렐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필자 또한 발등에 떨어진 불을 진화하느라 밤을 하얗게 지새웠기에 마찬가지였다.  

시험을 일찍 마친 사람들은 보통 서둘러 자리를 뜬다. 모자란 잠을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날 학생들은 그 소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었다. 실습을 앞두고 숙지해야 할 과제 제출용 전산 시스템에 대해 교육이 이어졌다. 택배를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물건이 집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만 같아 초조해지곤 한다.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쏟아지는 졸음은 참기가 쉽지 않았다. 달콤한 숙면이 가까운 듯 너무나 멀게 느껴졌고, 꼿꼿한 자세로 시험을 보던 동기들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오전 일정은 한 시쯤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본 행사는 3시 반에 예정되어 있었기에, 넉넉히 계산해 봐도 세 시간 정도 밖에는 남지 않았다. 짧은 인사와 함께 우리들은 재빨리 흩어졌다. 마음이 급했다. 휴식을 취하고 행사에 적합한 상태(?)로 탈바꿈하기까지는 현실적으로 시간이 촉박했다. 분명히 그랬다.

그렇지만 두 시간 뒤 다시 만난 학생들은 지금까지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말쑥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역시 독한 사람들이다. 다들 이래서 공부를 잘 하는 걸까. 무척 피곤할 텐데 그런 기색은 전혀 찾아보기 어려웠다(물론 필자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치장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간단히 리허설을 진행할 동안 함께 자리를 빛내줄 가족과 친구들이 점차 많아졌다. 행사가 진행될 어린이병원 제1임상강의실을 비롯해 가족들을 위해 동시 중계가 이루어질 바로 옆 제2임상강의실까지 자리가 가득 찼다. 그 누구도 피곤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행사장에는 생기가 넘쳤다.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목전에 둔 설레는 마음들이 느껴졌다. 행사보다도 그저 얼른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싶다던 동기들의 푸념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윽고 신찬수 의과대학 학장 및 서창석 병원장의 축사로 2019년 White coat ceremony가 시작을 알렸다. 서로의 멋진 모습에 감탄을 연발하며 떠들썩하던 학생들도 이 순간만큼은 진지한 자세로 선배들의 덕담에 귀를 기울였다. 원론적이고 쉬워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아무나 지키지 못하는 의사의 가치를 되새기면서, 이를 지켜나가기로 굳게 다짐했다.

다음으로는 지난 2년 동안 본과 3학년 학생들이 거쳐온 순간을 담은 비디오 클립을 시청했다. 4만여 장에 달하는 강의 슬라이드와 이를 점검하기 위한 총 45번의 시험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오직 나를 강하게 할 뿐이다’라는 니체의 인용구가 조금은 낯간지러우면서도 충분히 납득되었다. 영상의 백미는 단연 먼 곳에서 도착한 영상 편지였다. 제주도, 헝가리 그리고 인도네시아까지, 멀리 떨어져 자주 만나기 어려운 부모님이 보낸 축하와 응원을 보며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의학을 공부하고 성장하는 동안 많은 이들의 응원과 지지가 교차해왔음을 되새기고, 이를 건강하게 갚아 나가기로 함께 다짐했다.

백의(white coat)를 착용하는 다음 순서는 예상보다 신속히 진행되었다. 한 번에 다섯 명의 학생이 차례로 호명되어 나왔고, 강단에 서 있는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었다. 그리고 나서는 교수와 한 번, 좌중에게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엄숙한 순간이었다. 공연이나 발표를 하는 것도 아닌데다 여러 명의 동기와 함께 강단에 오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수많은 매체에서 접해왔던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거쳐갔던 것이라고 해서 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선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동안 이 시기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반복해왔을 짧은 문구였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한 단어 한 단어를 엄중히 간직했다. 그래서일까. 행사 직전 리허설에서 크고 작은 실수들이 나왔지만 실전에서는 그 누구도 실수하지 않았다. 어색할 만큼 깨끗하게 다림질된 백의와 마냥 어려 보이는 얼굴까지, 아직 무언가 풋내기 같은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직업 의식이 종언을 고한 시대라는 진단이 지배적인 가운데, 누군가는 이렇듯 반복되는 선언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흰 옷을 입는다고 해서 마술과 같이 우리의 내면이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가 되면 으레 거쳐가는 행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현실 속에서 초심은 언제나 연약하다. 그러나 우리가 뻔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살았던 적이 과연 있을까? 백 년 이상 지난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은, 그 속에 삶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들이 기뻐한 바로 그 경험 속에서 감격하며, 남들이 넘어진 바로 그 곳에서 절망한다. 인생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갈 것이다. 익숙하고 예상 가능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감격과 함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3학년 학생들은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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