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번 호에는 예일대학 호흡기 내과에서 근무하고 계신 동문 강민종 교수님 (min-jong.kang@yale.edu)의 특별 기고문을 싣습니다.


미국에서 연구자로 살아가기


강민종 교수(예일대학 호흡기내과)

미국에 2002년도에 왔다. 미국에서 연구자로 새 출발하기 전, 나는 연건동에서 내과 수련 및 호흡기 내과 전임의 과정까지 마치고 한림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1990년대 초반 내가 임상 수련 과정을 밟던 시절, 모교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의대 임상과에서도, “분자 세포 생물학(molecular & cellular biology)” 방법론을 이용하는 질병 발병 기전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 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의학 연구, 소위 “기초의학 연구 (basic medical research)”가 내과를 중심으로 임상 의학과에서도 막 시도되는 시기에 내과 수련을 받으면서 나도 기초의학 연구에 접할 기회를 얻었고, 그런 경험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 번 제대로 호흡기 관련 질병 발병 기전 연구를 해보고 싶다”라는 열망이 커졌으니까. 그래서, 미국 예일 대학교 의과대학에 방문 연구자 과정으로 처음 왔는데.. 그 때는 내가 이렇게 미국의 의과대학에서 독립된 연구자로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2002년 시월, “꿈은 이루어진다”는 붉은 악마의 응원 구호가 아직 뜨겁게 남아 있던 서울을 떠나 여기 미국에서의 연구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해 이곳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얼마나 아름답던지…… 사방이 아름드리 나무로 둘러 싸여 있어서 온갖 색깔의 단풍으로 세상이 물들어 있었고,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은 살랑거리는 미풍에 흔들리면서 찬란한 색깔을 흩뿌렸던 것 같다. 실험실에서 연구하다가 일부러 짬을 내어 중앙 도서관과 법대 건물 등이 위치한 쪽 – 흔히 “old campus”라고 불리는 곳 - 을 산책하곤 했다. 생동하는 젊음 속에 섞여서 다시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 듯했고, 더하여 주변의 모든 이국적인 것들이 새롭게 시작하는 설레임으로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 같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나처럼 분과 전문의까지 수련을 다 마친 임상 의사가 새롭게 기초의학 연구를 하는 데에 이곳 호흡기 내과는 최적의 연구 환경이었다. 동물 질병 모델을 이용한 “질병 발생 기전 연구”를 마음껏 해 볼 수 있었으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예일 의대는 면역학을 중심으로 기초의학 관련 토대가 아주 탄탄한 곳이었다. 서울에서는 논문 속에서만 보던 그런 연구를 직접 해 볼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내 연구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들이 주변에 실재했다. 기초의학 관련 토대가 충분하지 않던 곳을 온 몸으로 겪었기에 나는 새롭게 주어진 이 기회가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고 내 열정을 쏟아 연구에 몰두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소위 명문 대학교에 속하는 이곳 예일대학 의과대학에서 독립된 연구자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지금도 연구비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는 혹독한 현실이 존재하고. 하지만, 자기 적성에 맞는다면 생명 과학자, 혹은 의과학 연구자 만큼 세상에 좋은 직업도 흔치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의과학 연구자에게 잘 맞는 적성이라면 어떤 것들을 꼽을 수 있을까? 공부를 좋아하고, 또 호기심이나 탐구심이 많은 사람? 아마 서울 의대 동문들이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이 길은 멋진 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 주된 연구 주제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의 발병 기전 연구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 주제에 매달렸고, 십오 년 넘게 이 주제에 지속적으로 매달려서 연구할 수 있어서 참 좋다. 그리고 이 주제에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최근에 “폐노화” 관련 연구로 관심 분야를 넓힐 수 있었다. 다행히 미국 보건부 (NIH)로부터 “폐노화 관련 기초 연구”를 할 수 있는 5년 연구비를 받는 행운이 나에게 찾아 온 것이다. 두 연구 주제의 공통점은 “나이가 들면서 비가역적으로 폐기능의 감소가 진행한다”는 점이다. 이십 대 초반에 최고점에 도달한 후, 세월이 흐르면서, 혹은 흡연이나 대기 오염 등의 환경적인 요인에 노출되면서 인간의 호흡 능력은 지속적으로 저하 되는데, 이를 의미 있게 억제할 수 있는 신약 개발은 이 분야 관련 연구자들이 오랜 동안 꿈꿔온 주제이다. 내 연구실 또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 응용만이 내 연구 관심사는 아니다. 나에게 생명과학 연구는 그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다. 생명의 탄생부터 지금까지의 그 신비로운 진화와 생명현상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 이런 것들을 주로 생각하면서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달과 6펜스”라는 책에서 주인공을 설명할 때 나오는 표현으로 기억한다. “동그란 구멍 속에 박힌 네모난 못”처럼 주변 현실에 잘 맞지 않는 사람으로 주인공을 설명하는 그 구절 말이다. 혹시 우리나라에서의 삶이 이렇게 느껴질 때는 없는지…… 우리나라의 의료 환경에서, 또는 의과대학 병원에서 임상의사로서 생활하는 것이 왠지 내 몸에 잘 맞지 않는 정장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고, “이건 아닌데..” 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그런 날들이 많다면, 미국 혹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도전을 꿈꿔 보라고 권해 주고 싶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멋진 달이 떠 있을 것 같은 그런 곳으로의 모험을 우리는 갈망하지 않는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림1. 예일대학교가 위치한 뉴헤이븐의 가을 풍경. 정면에 예일대학교 old campus의 상징인 시계탑(정식 명칭은 Harkness Tower)이 보인다.


그림2. 예일대학교 old campus, 늦가을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