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마당 - 학생기고]
인도 한센병 필드스터디를 다녀와서
한희원 학생(본2)
질병이란 “유기체의 신체적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감기를 걸리는 것부터 암에 걸리는 것 모두 다 단지 신체적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되어 불편함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즉, 질병의 유무는 사람들의 건강을, 건강만을 설명할 수 있는 지표이다. 질병에 걸리는 것은 죄가 아니며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사람이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한센병 역시 질병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센병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성경에서도 저주와 같이 묘사된 이 질병은 사람의 형상을 “망측하게”, “흉하게” 만든다. 이 질병은 사람들의 손가락부터 발끝까지 망가뜨리고 심지어 그들의 시야까지 앗아간다. 하지만 그들에게 더 힘들게 다가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다. 한센인들의 고통에 사회는 소외로 보답했고, 이들과 섞여 사는 것이 너무 싫었던 사람들은 그들을 한 지역으로 몰아넣어 격리수용소를 만들고 사회 속에서 지웠다.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와 서울의대 건강사회교육센터에서 주최하는 지역의료 희망캠프로 인해 나는 2박 3일 동안 소록도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소록도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았던 나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른 채로 소록도에 발을 디뎠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었다. 어르신들의 세 끼를 챙겨드리고 어르신들을 닦아드리고 말동무를 해드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많은 것들을 해드릴 수 없었지만, 그분들은 나에게 너무 많은 정을, 웃음을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그분들의 말씀은 나에게 아픈 깨달음을 주었다.
최만호 할아버지께서는 13살 때 한센병에 걸리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의 형제들과 자매들은 할아버지를 가두고 세 끼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고 이 생활을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드셨던 할아버지는 길거리 생활을 시작하셨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아무 이유 없이 때렸다고 말씀하셨다. 아니,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할아버지를 때렸고 하셨다. 길바닥생활에서 전전긍긍하시던 할아버지는 소록도에 들어오시게 되었다.
소록도에서의 생활 역시 순탄치 않으셨다고 했다. 일본강점기 때의 소록도 병원장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막노동을 시키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고 해방 이후의 병원 관계자들의 환자들에 대한 처우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힘겨운 생활을 견디셔야 했다고 말씀하실 때 할아버지의 얼굴이 정말 슬퍼 보였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소록도에서의 시간이 차라리 더 나았다고 말씀해주셨다. 힘든 막노동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이 사람들의 삿대질과 혐오였다고, 소록도에서는 편견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행복했다는 말을 해주셨다.
소록도에서의 짧았던 2박 3일의 시간을 보내고 버스에 타면서 막연하게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었지만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람은 사람으로, 질병은 그 질병 자체로만 생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 세상 아무 누구도 어르신들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리고 무엇보다 견뎌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 있는 내내 휴대전화로 한센병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이 질병이 가진 오래된 역사, 이 질병 치료의 간단함 모두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매우 놀라웠다. 하지만 그중에 제일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이 질병의 세계적인 유병률이었다. 이 순간에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이 전염성이 매우 낮은, 쉽게 치료할 수 있는, 하지만 무서운 후유증을 남기는 이 질병에 걸리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잔인한 시선들과 편견들로 인해 사회의 변두리로 추방당하고 있었다. 대략 300만 명의 사람들이 한센병으로 인한 후유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매년 약 22만 명의 사람들이 새로 감염되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 후 나는 한센병을 주제로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센병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찾아본 모든 책, 모든 논문이 빠짐없이 인도에 대해, 인도에 있어 한센병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얘기했다. 2012 년에만 인도에서 134,752건의 새로운 사례가 발견되었고 이것이 매우 과소 평가된 수치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내 관심은 자연스럽게 인도로 향했다.
인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직후 나는 동기 중에서 한센병 문제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을 물색하였고 결국 마음이 맞는 3명의 친구와 함께 인도로의 필드스터디를 계획하게 되었다. 일단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델리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20개의 한센병 관련 NGO에 내 입장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정말 다행이게도 3개의 NGO로부터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대답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세 개의 NGO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본 후에 영국에 기반을 두고 있는 LEPRA 라는 단체의 도움으로 인도를 방문하게 되었다.
무턱대고 찾아간 인도에서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인도에서 가장 경제적 수준이 낮은 지역 중 하나인 비하르 지역에 가게 되었고 비하르의 state coordinator Rajni Kant Singh 선생님과 함께 여러 leprosy colony와 leprosy center 들을 방문하면서 어떻게 환자들이 진단되는지, 어떠한 치료들이 어떤 방법으로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라즈니 선생님 한 분의 전문성, 관심, 그리고 의지가 수많은 사람의 삶의 질을 증진하는 것을 보고 국제 보건에 있어 훌륭한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라즈니 선생님께서 관장하시는 센터들은 잘 운영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수많은 leprosy colony 들이 무관심 속에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센병 환자들이 어떠한 편견 속에 살아야 하는지 직접 그들에게서 들은 후이기에 답답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도 정부의 새로운 정책(elimination의 정의를 1 case in 10,000 people로 바꾸어 인도를 leprosy free country이라고 발표함)으로 인해 한센병 예방 및 치료 프로그램의 후원금이 40% 정도 삭감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또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leprosy의 발병률이 실제로는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의 마지막 여정은 네팔과 인도의 접경에 있는 Little Flower Hospital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Little Flower Hospital은 마더 테레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지은 병원으로, 이곳에는 3,000명 정도의 환자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Little Flower는 dairy farm, scarves manufacturing 시스템을 운영하며 얻어지는 이익으로 마을에 사는 3,000명을, 그리고 비하르 지역의 다른 leprosy colony 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교육과 의료를 무료로 지원하고 심지어 신체적 어려움으로 인해 일을 못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달 지원금을 주고 있었다. 카비타 바타하리 라는 월드뱅크에서, 캐나다의 여러 NGO에서 일한 경력 있는 지도자의 지휘 아래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실제로 실현되고 있었다. 카비타 선생님의 Little Flower Hospital에 대한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에 나는 울컥했다.
하지만 Little flower에도 역시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한센병에 대한 지원금이 줄어들면서 카비타선생님께서 실행에 옮기려 한 많은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겼다. 원자재를 계절에 맞게 저렴하게 구매하여 실크 제작에 들어가는 input을 줄여 이윤을 증가시키려고 했던 노력이 금전적인 지원이 끊기면서 무마되었고, 학생들을 위해 지은 학교는 지붕이 씌워지지 않은 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제일 심각한 문제는 Little Flower Hospital에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많은 사람을 관리하는 병원에는 단 한 명의 물리치료사 그리고 세 명의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는 과거 한센병 환자들이 간호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마을의 환자들이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이 지역에 있는 또 다른 병원인 Duncan hospital에 refer 하여 돈을 내고 치료를 받는다. 카비타가 말하기를 이 지출만 없어도 자신의 시스템은 sustainable 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안타깝다는 느낌보다 화가 났다. 이렇게 사람들이 방치될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의 지원만 있으면 비상할 수 있는 이런 시스템이 지원이 끊김으로써 멈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colony들이 인도에 수 십 개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리고 너무 답답했다. 한국으로 얼른 돌아가서 뭐라도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많은 일을 벌여 보고자 한다. 스카프를 팔 수 있는 펀드레이징 이벤트를 세워서 카비타가 건강한 소를 마련할 수 있는, 계절에 맞게 raw material 을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해주는 것을 돕고 싶다. 올해 여름에는 관심 있는 친구들, 선배들과 함께 Little Flower를 방문해서 의료 봉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의료봉사를, 아직 그 수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노력봉사를 하여 더 많은 사람이 한센병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병원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보려고 한다.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고 인도가 leprosy free country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문을 작성하여 국제사회에 알리고 싶다. 이 많은 것들을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도전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도움을 보탠다면 변화가, 그 변화가 매우 작든 크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