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학전문학교 한국인 의학도의 졸업앨범, 『형설기념(螢雪記念)』


김상태 교수(의학사연구실)

『형설기념(螢雪記念)』의 한국 전도


경성의학전문학교 1924년 졸업앨범 속 한국 전도

한국인이라면 볼 때마다 가슴 뭉클해지는 한국 전도(全圖). 그런데 위의 지도에는 무언가 색다른 점이 있다. 지도 곳곳에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지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식민지 시절인 191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전문학교관제’와 ‘경성의학전문학교규정’이 반포되어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의 전신, 이하 ‘경의전’)가 문을 열었다. 경의전은 기존의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를 인계했다. 입학자격은 한국인은 16세 이상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일본인은 17세 이상의 중학교 졸업자였다. 기초 강의는 1-2학년 과목으로, 임상 강의는 3-4학년 과목으로 편성되었다. 교사(校舍)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네거리에 있었다.

1924년 3월 1), 경의전을 졸업한 한국인 학생은 모두 49명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일본인 졸업생들과 별도로 그들만의 졸업앨범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과 한국인 학생이 함께 다니는 관립학교에서 한국인들만의 졸업앨범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인 졸업생들은 졸업앨범에 이름까지 붙였는데, 그 이름은 『형설기념(螢雪記念)』이었다.2) 우리가 잘 아는 ‘형설지공(螢雪之功)’에서 따온 말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관립학교에서 극심한 민족차별을 받으면서도 학업에 힘써 졸업에 성공한, 그 감격스러운 느낌을 표현한 것이리라. 또한 이들 중에서 김동익(金東益), 박병래(朴秉來), 이선근(李先根), 최상채(崔相彩), 이종륜(李鍾綸) 등 훗날 의학계와 의료계에 크게 기여한 의학자들이 나온 만큼, ‘형설’이라는 어휘는 정말 잘 어울린다.

앞서 본 한국 전도는 이 졸업앨범의 머리말 다음에 실려 있다. 졸업생들은 조국의 지도 위, 자신의 고향에 해당하는 지점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자신과 고향과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당당하게 표현한 것이다. 민족의 미래를 비출 ‘형설’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소망도 느껴진다.

1) 일제강점기에는 3월에 학기가 끝나고, 졸업식도 3월에 거행하였다. 새 학기는 4월에 시작하였다.

2) 이 사진첩은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의 한 사람인 김상후(金尙厚)의 가문에서 보관해왔다. 김상후는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났고, 경의전 졸업 후 1930년경 평북 박천군에서 현미경과 오토바이를 갖추고 동신의원을 개업하였다. 역사와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형설기념(螢雪記念)』의 머리말


경성의학전문학교 1924년 졸업앨범 머리말(1924)

『형설기념(螢雪記念)』에서 단연 압권은 한 졸업생이 지은 머리말이다. 학우들 사이의 우정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도 좋고, 당대에 대한 역사인식도 훌륭하며, 미래를 개척하려는 의지와 소망까지 표현되어 있다. 머리말 중 주요 내용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전생의 인연인지 모르나
13도 곡곡에서 생면부지의 마음 다르고 얼굴 같지 않은
50여 명의 배우들을 한 무대에 쓸어 넣고
시침 뚝 떼고 지구는 태양을 네 번이나 돌았다.
(중략)
다시 머리에는 이론(理論)의 투구를 쓰고
손에는 실제(實際) 칼을 잡고
가슴에는 진실(眞實)의 투구를 입고
사방팔방으로 각각 제 길을 걸으려 할 제 우리는
슬퍼할까?
기뻐할까?
하루 밤에도 만리탑을 쌓는다 하거든 일천 사백 육십 날을
나날이 살과 살이 서로 부딪치고 영혼과 영혼이 호응하였으니
한 부모의 배에서 나오지 않았을망정 그 사이 연결됨이 형제와 무엇이 다르랴!
(중략)
사람마다 다 외롭고 그 전체가 또 외로웠으나
그래도 믿고 의지할 데는 우리 형제 서로뿐
목이 마를수록 물에 대한 갈망이 더 깊고
구차할수록 돈에 대한 욕구가 많은 것처럼
우리는 고독할수록 더욱 우리끼리의 애정이 깊어졌을 것이다
(중략)
삼천리나 되는 폐허는 누구의 입김으로 새 문화가 일어날 것이며
이천만의 황량한 마음과 정신은 누구 손으로 개척될 것이냐
우리의 동맥 속에는 선홍색의 피가 뛰놀고
우리의 동공 안에는 형형(炯炯)한 빛이 번쩍이고
우리의 폐에는 씩씩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추수할 곡식이 많을수록 추수꾼의 마음이 더 기쁜 것 같이
우리가 건설하고 개척하고 개조할 가을이 풍부하였으니
예지(銳知)와 이기(利器)와 양심(良心)을 가진 우리 가슴,
자못 희열과 용기로 충만함도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


구보 교수 망언 사건


경성의학전문학교 해부학교실(오른쪽 상단 구보 교수)

『형설기념(螢雪記念)』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심술 많은 서모(庶母, 계모)에게 때때로 죄 없는 구박을 받고 불쌍한 외로운 형제들
옛 어머니 생각하고 머리를 맞대고 울어본 적이 몇 번이며
(서모가) 등을 때려서 밖으로 쫓아낼 때 젖 먹던 힘을 모아 반항한 적 몇 차례냐!!"

좁은 의미에서 ‘심술 많은 서모’는 학교 당국 또는 일본인 교수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조선총독부 또는 일본제국주의를 가리킨다. 따라서 ‘옛 어머니’는 우리나라 또는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일제의 차별교육 또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비유한 내용이다. 식민지 시절 관립학교를 다닌 한국인 학생들이 졸업하면서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졸업앨범을 만든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민족의식, 항일의식을 느끼며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위의 머리말에는 ‘반항한 적 몇 차례냐’라는 구절도 들어 있다. 민족의식이 강렬하였다지만 정녕 행동에 옮길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런데 사실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구보 교수 망언 사건이다.

1921년 5월 말, 한 일본인 교수의 ‘망언’으로 경의전은 들끓게 되었다. 해부학 실습실의 두개골 하나가 없어진 것을 두고 해부학 교수 구보(久保武)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국인 학생의 소행이 분명하다면서, 한국인은 원래 해부학적으로 야만인에 가깝다는 등의 폭언을 한 것이다. 이에 평소 해부학 수업 때도 민족적 굴욕감을 참고 견뎌왔던 194명의 한국인 학생 전원이 구보 교수의 수업을 거부하고, 응당한 조처가 취해지지 않으면 동맹휴학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학교 당국은 ‘주동자’ 9명을 퇴학시키고, 나머지 185명을 무기정학 처분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자 한국인 학생 전원은 다시 자퇴를 신청하며 맞섰다.

이 사건은 언론 보도를 타고 금세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경의전 졸업생들로 구성된 교우회(校友會)와 학부형들이 중재에 나섰다. 사이토(齋藤實) 총독마저도 3.1운동 때처럼 한국인 전체가 분노하여 저항할 것을 우려해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사건 발생 약 한 달만인 6월 28일 학교 당국이 학생 징계조치를 철회하고 구보 교수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약속함으로써 수습의 가닥이 잡혔다. 결국 구보는 이듬해에 학교를 떠났는데, 얼마 후 일본에서 정신병에 걸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