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역사스케치



근현대 한국의 국민병 결핵과 김경식 교수




김상태 교수(의학사연구실)




결핵으로 해마다 4만 명이 숨지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병 중 하나인 결핵은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를 휩쓸었다. 햇볕을 자주 쬐지 못하는 청소년과 영양 결핍자, 빈민 등이 많이 걸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가, 음악가 등 창작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나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이 잘 걸려 ‘천재와 미인의 병’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들은 영양상태 면에서 면역체계가 부실하다 보니 쉽사리 결핵균의 표적이 되곤 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의 결핵환자는 대략 40만 명. 해마다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4만 명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1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4호로 ‘폐결핵 예방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환자로 판명된 이들은 격리 수용하게 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대응은 이와 같은 관련 법규 제정과 기초적인 예방책에 머물렀다.

적극적으로 결핵 치료책을 모색한 것은 선교병원들이었다. 세브란스병원, 미국감리회 소속의 해주 구세요양원, 캐나다장로회 소속의 함흥 제혜병원, 천주교의 성모병원 등이 결핵환자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1928년에 세운 해주 구세요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원으로 결핵 퇴치의 상징적인 의료기관이었다.




해주 구세요양원의 정원(1930년대)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 : 거북선에서 남대문으로


 셔우드 홀은 한국인들에게 결핵퇴치운동을 홍보하고 결핵환자 치료자금을 모으기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친한 일본인 관리가 크리스마스실 발행에 대해 적극 동조해주었다. 셔우드 홀은 직접 크리스마스실을 도안하면서 한국인들의 열정과 가능성을 고취할 수 있는 그림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아이들이 어른들이 들려주는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점을 떠올렸다. 도안에서 거북선이 국가의 적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도록 대포를 배치했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는 거북선 도안에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지난날 일본군의 패전을 떠올린 것이다. 결국 셔우드 홀은 심사숙고 끝에 새 도안을 서울의 남대문으로 결정했다. 그는 남대문을 결핵을 방어하는 보루로 설정했다. 마침내 한국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실이 발행되었다.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1932)




1950~1970년대의 국민병(國民病), 결핵


1950년대의 한국 사회라고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개념어들이 있다. 분단, 멸공, 장기집권, 부정선거, 절대적 빈곤, 삼백산업(三白産業), 부정부패, 실향민, 판자촌 등이다. 그런데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고은 시인이 1958년 문단에 나올 때 발표한 시는 이 개념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순수 서정시도 아니다. 그의 데뷔 작품의 제목은 “폐결핵”이다.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 하이드라지드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긴 숨이 창 너머 하늘로 삭아가버린다.
오늘, 슬픈 하루의 오후에도
늑골에서 두근거리는 신(神)이
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청년의 답답하고 서글픈 내면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럼 당시 고은 시인이 폐결핵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병력(病歷)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1950년대 한국은 결핵 전성시대였다.
해방 후 한국인들의 가난이 계속되고 보건위생 여건이 나아지지 않는 가운데 교통수단의 발달과 도시화로 인한 인구의 집중으로 결핵균은 더 빨리 퍼져나갔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1952년 전국의 결핵환자는 120만 명에 달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서울시내 남녀 고등학생들을 검진한 결과 결핵 보균자가 6.63%나 되었다. 1962년에도 전국의 결핵환자가 80만 명, 해마다 4~5만 명이 결핵 때문에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65년 9월 대한결핵협회는 서울시민의 6.2%, 서울시내 초등학교 아동의 45.2%가 결핵에 감염되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보건소를 중심으로 결핵 퇴치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전국에 결핵 전문병원이나 요양소는 몇 곳밖에 없었다. 1962년경 전국에 입원해야 할 결핵환자가 50만 명인데, 병상은 3천에 불과했다. 그래서 당시 한 신문은 대한민국을 가리켜 “폐결핵에 무관심한 왕국”이라면서 “한 해에 읍 하나가 망해도 먼 산의 불 보듯” 한다고 정부 당국의 무관심과 무대책을 비판했다.

결핵은 환자 본인은 물론 환자의 가정까지 무너뜨릴 만큼 무서운 질병이었다. 1972년의 일이다. 어느 가정주부가 가출을 했다. 외도나 가정폭력,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결핵에 걸려 객혈까지 하게 된 이 주부는 행여 자식들을 전염시킬까 두려워서 남몰래 집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미리 남편과 이웃에게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했고, 집을 나가기 전 “꼭 고쳐서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남겼다.




결핵 치료에 헌신한 김경식 교수



김경식 교수(1960)



결핵이 국민병이라 불리던 시절, 당대 최고의 결핵 치료 전문가로 활약한 사람은 서울의대 내과학교실의 김경식 교수였다. 그는 1911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출생했다. 평양의 감리교계 사립학교인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에 입학했다. 1937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제1내과이던 이와이(岩井誠四郞) 내과에 입국했다. 1942년 「일측병신(一側病腎)이 타측건신(他側健腎)의 기능 및 형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내과 강사로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경성제대 의학부는 경성대학 의학부를 거쳐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거듭났다. 김경식은 서울의대 내과학교실에서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1952~1959년 주임교수를 역임하면서 교실 발전을 주도했다. 1959년부터 2년 동안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의해 미네소타대학에서 연수했다. 귀국 후 후진 양성과 학문 발전에 헌신하다가 1976년 2월 정년퇴임을 했다.

김경식의 평생의 과제는 결핵 치료였다.




김경식 교수의 회진(1960)



그가 활동한 시기는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 아이나(INH), 파스(PAS)가 개발되면서 화학요법이 시작된 때였다. 더욱이 당시 우리나라는 결핵이 만연해서 ‘망국병’이라고 불리던 때였으니 결핵의 화학요법 연구는 시대적 사명이기도 했다.

김경식은 임상 경험을 통해 핵심을 파악하는 직관력이 매우 뛰어났다. 그가 세운 가설과 연구업적 중에는 세계 최초라고 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한 예로 그의 지도로 한용철의 박사학위 논문이 되었던 「아이나의 기명력(記銘力)에 대한 영향」은 아이나가 기억력을 떨어뜨리는 것 같다는 김경식의 임상 관찰에서 시작되어 이를 정신과학적, 심리학적 방법론을 통해 계량화하여 증명한 것으로 현재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스웨덴의 연구보다 1년 먼저 발표되었다.

또한 결핵의 화학요법 약 중에서 최초로 개발된 스트렙토마이신은 결핵 치료에 효과가 있었지만, 가격이 매우 비싼데다가 단독요법으로 하면 단기간에 내성이 생기고 결핵성 뇌막염에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아이나와 파스가 도입되면서 결핵의 병합요법이 시작되었는데, 초창기에는 미국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이 두 가지 약제로 성공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김경식은 경증 환자는 이 두 가지 약제로 치료할 수 있을지 몰라도 중증환자에는 더 많은 결핵 약제의 투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3제 처방을 했다. 그의 견해는 당시의 정설과 배치되는 것이었지만, 몇 년 후 미국에서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다. 즉 김경식은 세계 최초로 3제 병용 결핵 치료를 한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아이나의 등장으로 결핵에 대한 본격적인 화학요법이 시작된 직후에 김경식은 당시 아이나의 적정량으로 알려져 있던 1일 300~400mg을 초과하여 대용량 요법을 시도했다. 그러자 동료 교수가 교과서 내용과 다르다고 비판했다. 이에 김경식은 “화학요법의 원칙은 독성이 나타나지 않는 한 최대 용량을 투여하여 최대 효과를 얻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몇 년 후 그를 비판했던 동료 교수가 미국에 연수를 가서 미국 학자들이 김경식과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선견지명과 혜안에 놀라 사과 편지를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