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역사스케치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김상태 교수(의학사연구실)




* 서울의대에 제2부속병원이 있었다?


내과 교수이자 제3대 서울의대 제1부속병원장을 역임한 김동익은 원장 재직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원장을 맡았던 때는 1949년 11월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좌, 우 대립이 심해서 전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어요. 게다가 제1, 2병원을 운영하자니 예산문제, 교수 교체문제, 병원장끼리의 문제도 많았지요.”(‘원로와의 대화’, ‘병원보’ 1986년 10월)


김동익은 1949년경 서울의대에서 좌우 대립이 심했다고 회고하고, 당시 서울의대의 부속병원이 두 곳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고 토로했다. 즉 서울의대 초창기에는 부속병원이 하나가 아닌 두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2부속병원 산부인과(서울의대 제2산부인과학교실)의 주요 멤버였던 배병주의 회고담을 통해서도 제2부속병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6.25사변으로 (산부인과) 교실원 대부분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3개월간 공백기를 지나 9.28 수복이 되니 윤태권 교수 이하 본인(배병주)과 홍용준 선생 등이 자원하여 군에서 사용하게 된 소격동의 제2병원에서 산부인과에 있던 기재, 도서, 시설물 기타를 우마차 수십 대에 싣고 제1병원에 이송하였다.”(‘의학 반세기의 회고’, ‘병원보’ 1989년 11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 중 9.28 서울수복 직후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이 군병원으로 재편되었다는 점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국방부는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을 돌려주지 않았다. 1963년 1월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은 국방부 관할 병원으로 아예 전환되고 말았다.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이 완전히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럼 이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은 대체 어떤 병원이었을까. 이비인후과 교수를 지냈고, 서울의대 및 서울대병원 역사에 정통하기로 유명한 백만기는 회고담을 통해 제1, 제2부속병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두 대학이 합쳐 국립서울대학이 되었기 때문에 연건동에 있는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을 제1병원, 소격동에 있는 경성의전 부속병원을 제2병원이라 했고, 후에 한때 동(東)병원, 서(西)병원으로 불린 적도 있다.”(‘의학 반세기의 회고’, ‘병원보’ 1989년 10월)


즉 해방 후인 1946년에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가 통합되어 서울의대가 설립되면서 전자의 부속병원은 제1부속병원, 후자의 부속병원은 제2부속병원이 된 것이다. 아울러 지리적 위치에 따라 전자는 ‘동병원’, 후자는 ‘서병원’이라는 별명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서울의대 초창기 역사에서 법적으로 약 17년, 실질적으로 약 4년 동안 존재했던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의 전신은 경복궁 동쪽 삼청동 인근의 소격동에 있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이었다.


*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의 전신,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의 모습이다.




경의전부속의원 표목(1930년대)



지금은 광화문 부근의 도로 한복판에 쓸쓸히 놓여 있지만, 1930년대 초만 해도 경복궁 담장 동남쪽 모서리 망루(望樓)로서의 위용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오른쪽 다리 옆에 표목(標木)이 하나 서 있다. ‘의전병원(醫專病院)’, 즉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이하 ‘경의전부속의원’)의 입간판이다. 사진 속 동십자각에서 삼청동 쪽으로 담장을 따라가면 경복궁의 건춘문(建春文)이 보이고, 개천 건너편에 어렴풋이 경의전부속의원의 지붕이 보인다. 병원, 특히 대형 종합병원이 아주 귀했던 시절에 새 관립병원이 생긴 것이다.



그럼 경의전부속의원은 어떤 병원이었을까?


1922년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조선에 대학 설립이 가능해졌다.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를 대학으로 격상시키자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예과, 법문학부, 의학부)을 신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경의전의 부속병원 같았던 총독부의원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개편되었다. 이로써 1928년에 경의전은 지난 12년 동안 사용해오던 실습병원과 작별인사를 했다. 다수의 교수들은 경성제대 의학부로 적을 옮겼다.

경의전에 남은 교수들과 학생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부속의원 신축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1928년 11월 29일, 마침내 경의전부속의원이 경복궁 인근 소격동의 종친부(宗親府) 터에서 개원했다(공식 개원일은 1928년 11월 30일)




경의전부속의원 전경(1929)




1933년에는 3층짜리 외래진료소가 완공되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비뇨기과, 정신과, 치과 등 임상 9개 과와 약국이 설치되었다. 진료실적을 보면, 1935년의 경우 입원환자 2,062명, 외래환자 25,214명이었다. 환자 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 당시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의 62%에 해당했다.



*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의 최고 외과의사, 백인제


경의전은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의 공학이었다. 처음에는 한국인 학생이 좀 더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본인 학생이 많아져서 한국인 학생이 경의전에 입학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경의전과 부속의원의 교수와 의사는 더했다. 한국인 교수와 의사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특히 주임교수는 미생물학교실의 유일준(兪日濬)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1928년 30세의 나이에 도쿄제대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경의전의 교수가, 그것도 당대에 가장 중요했던 외과학교실의 주임교수가 된 청년의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인제(白麟濟)였다.





백인제(1928년 경의전 외과학교실 주임교수 임용 직후)



백인제는 1899년 평북 정주(定州)의 유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고, 일찌감치 개화의 흐름을 수용했다. 그는 1912~1915년 오산학교를 다녔다.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와 함께 항일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주요 교육사업 중 하나로 설립된 명문학교였다.

1916년 백인제는 경의전에 입학했다. 3ㆍ1운동 발발 직전까지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의학 공부에 정열을 불태웠다. 일본인 교수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공부벌레였지만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가 시위에 적극 참여했고,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다. 경의전에서 퇴학도 당했다.

백인제가 출옥한 1920년은 그의 인생에서 분수령에 해당했다. 상하이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 설움을 참고 이겨내면서 의사와 의학자가 될 것인가. 그는 처절한 고민 끝에 의학 공부를 선택했다. 물론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만 했다. 이전에 받던 장학금이 사라졌다. 1921년 수석으로 졸업했건만, 남들은 졸업만 해도 받는 의사 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총독부의 ‘보복’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당시 의사라면 누구나 싫어하던 마취 일과 의학 연구에 몰두했다. 마침내 1923년 의사 면허증도 받았다.

1928년 백인제는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로 도쿄제대 의학박사가 되었다. 이어서 1928년 6월 1일자로 모교인 경의전 외과학교실의 주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1941년까지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백인제 교수의 외과 수술 장면(가운데, 1929)



그 대표적인 계기가 있었다. 우선, 1928년 오산학교 때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가였던 이광수의 건강이 나빴다. 이때 백인제는 그의 좌신결핵(左腎結核)을 진단하고, 국내 최초로 좌신적출(左腎摘出) 수술에 성공했다. 제자 백인제가 스승 이광수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다. 둘째, 1937년 세계 최초로 유착성(癒着性) 장폐색 환자의 폐색부 상부 위관에 공장루(空腸瘻)를 만들어 환자가 기력을 회복했을 때 장 폐색의 근치술을 실시해 그 유효성을 입증했다.

백인제는 의학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1931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과, 1938년 혈액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재복, 장기려, 김희규, 김자훈, 윤덕선 등 수많은 제자들을 한국의 저명한 외과의사로 양성했다.

백인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한국인 의학도들뿐만 아니라 일제의 가혹한 통치에 시달리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