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역사스케치



한국전쟁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김상태 교수(의학사연구실)



*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부터 만 3년 2개월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파괴전이자 소모전이었다. 우리의 금수강산이 초토화되었고, 공장들과 철도,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이 파괴되었다. 인명피해가 엄청났던 것은 물론, 미망인과 고아, 상이군인과 이산가족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남북한 간의 정치적, 사상적 갈등과 대립은 극에 달했다.


한국전쟁은 국내 의료계 또한 파괴했다. 전국에 산재한 1,000여 개의 병원, 의원이 파괴되거나 문을 닫았고, 의료장비와 의약품도 못쓰게 되었다. 상당수의 의료인은 납북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일지라도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모든 것이 파괴되는 와중에 국내 의학계는 큰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 미국,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선진국의 의료지원에 힘입어 임상의학, 특히 전상자(戰傷者) 치료와 관련이 깊은 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마취과 등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럼 한국전쟁 동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특히 교직원, 학생, 동문들은 한국전쟁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그들은 의학과 의술 면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고,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 전쟁 초기에 피난을 가지 못한 까닭


6월 25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의 교직원들은 놀라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당시 38선상에서 남북한 군대 사이에 빈발했던 교전 정도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전면전이 일어났다 해도 미군이 개입하면 전쟁이 곧바로 수습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6월 26일, 서울의대부속병원의 상황은 급박했다. 전상환자(戰傷患者)들이 속속 밀려들었고, 전세가 불리해서 서울이 위험하다는 얘기가 병원 안에 돌면서 의료진은 혼란에 빠졌다.

6월 27일, 상황은 더욱 열악해져서 피난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해부학교실의 정일천 교수는 유엔군의 즉각 참전과 수도 사수(死守)라는 라디오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외과의 젊은 의사 문태준은 피난을 결심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고 강조하자 결정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 라디오 방송은 녹음 방송이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가 피난을 원천 봉쇄한 셈이었다.




* 북한군 치하 공포의 나날



한국전쟁 중 납북된 이갑수 서울의대 학장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공포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은 당연히 북한군 수중에 들어갔다. 북한군은 입원 중이던 국군 부상환자들을 끌어내 영안실 부근에서 학살했다. 교육과 연구 등 대학 고유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해부학교실 정일천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이갑수 학장은 반동분자로 지목되어 행방불명되었다. 대다수의 교수들은 새 신분증으로 식량을 배급받았고, 러시아어 공부를 강요당했다. 외과의 젊은 의사 문태준의 회고에 따르면, 전쟁 전에 잠적했던 동문들이 공산당 간부가 되어 나타나 부속병원을 지휘했다. 대다수의 의사, 간호사, 기사들은 공포와 실의 속에서 북한군 지시에 따라 로봇처럼 행동해야 했다.

북한군 치하의 험악한 상황에 내몰린 교직원과 학생들은 이 위기상황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첫째, 기회를 엿보아 서울을 빠져나가 연고가 있는 지방으로 피신했다. 둘째, 자기 집이나 서울의 친지 집에 은신했다. 특히 벽장, 천장, 마루 밑, 땅굴, 집 근처 야산의 동굴 등에서 숨어 지냈다. 셋째, 위장을 통해 위기를 모면했다. 예를 들어 내과 한심석 교수는 폐결핵에 걸렸다는 가짜 진단서를 제출하고 휴직했다. 학생 이선호는 7월 초순에 학교를 찾았다가 50여 명의 학생들이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놀란 나머지 만일의 사태에 대비코자 반공 성향의 책과 일기를 태워버렸고, 그날 이후 일부러 붉은 천 조각을 가슴이나 허리띠에 매고 다녔다.

서울의 북한 당국자들에게 차출되어 전선에 끌려 나갔다가 탈출한 교직원과 학생도 있었다. 외과 한격부 교수는 충북 제천으로 끌려가 북한군 부상병들을 치료하다가 탈출에 성공했다. 졸업반 학생 백낙환은 낙동강전선의 안동야전병원으로 강제 이동하던 중 미군의 공습으로 북한군 대열이 흩어지자 탈출을 감행해 성공했다.




* 서울 수복과 새로운 갈등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피신해 있었거나 북한군 치하에서 고초를 겪던 교직원과 학생들이 서울의대와 부속병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새로운 갈등과 불행이 불거졌다. 피난을 갔다 돌아온 ‘도강파(渡江派)’가 3개월 동안 서울에 남아 있던 ‘잔류파(殘留派)’의 부역행위를 심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잔류파는 북한군에 동조하여 피난을 안 간 것이 아니라 정부 당국의 잘못된 처사에 의해 피난을 못간 것이 분명했다. 북한군 세상이 된 서울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고 공포의 나날을 겪으며 서울이 수복되기만을 학수고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유엔군을 따라 서울에 돌아온 도강파는 잔류파를 상대로 강도 높은 ‘사상 검증’을 벌였다.

당시 심사대상에 올랐던 교직원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내과 한심석 교수는 회고록을 통해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탈출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서울에 잔류하여 공산군 치하에서 갖은 고생들을 겪은 교직원들에게 위로는 못해줄 망정 심사를 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쳤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비뇨기과 주근원 교수도 회고록에서 “우리들 잔류파를 심사한다고 하니 고생한 것만도 억울하고 구사일생한 사람이 많은데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약자인 까닭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억울했던 심경을 토로했다. 당시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교수도 있었다. 해부학교실 정일천 교수는 교수회의 석상에서 “만약 또다시 공산군이 쳐들어온다면 그네들과 악수 안 할 사람이 누구냐?”라는 뼈있는 발언을 던지기도 했다.




* 1.4후퇴와 부산 피난살이


9.28 서울수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그러나 ‘중국의용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1.4후퇴를 단행하여 서울을 재차 넘겨주게 되었고, 이번에는 대다수의 교직원과 학생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1.4후퇴 당시 피난민 행렬



전시 조치에 따라 서울의대부속병원은 제36육군병원으로 개편되었다. 제36육군병원은 제1선에서 국군 16개 사단 가운데 13개 사단을 지원했는데, 입원환자 하루 최고 1,323명, 1년간 입원환자 58,320명이라는 기록을 수립했다.

제36육군병원에 합류하지 않은 교직원들은 1951년 2월 하순 제주도 한림에 구호병원을 개원했다. 시설은 매우 부실했으나,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 종합병원다운 조직을 갖추었다. 이 구호병원은 보건의료 환경이 열악했던 제주도 도민의 질병 치료에 크게 기여했다.

1951년 5월, 서울의대는 부산에서 전시연대(戰時連帶)의 일환으로 개강했다. 서울의대를 주축으로 연세의대, 서울여의대 등 50여 명의 학생들이 수강했다. 1951년 겨울부터는 서울의대 재학생으로 군복무 중이던 학생들이 복교했다. 부속병원도 부산의 일본 사찰을 빌려 개원했다. 1952년 4월 초, 병원 규모는 10병상에서 40병상으로 늘었다. 오전 근무만 하던 것이 오후 근무까지 연장되었고, 4월에는 X-Ray 장치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20대의 학생들에게 부산 피난 시절은 우울한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이선호는 1952년 7월 1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비에 굶주리고, 밥에 굶주리고, 지식에 굶주리고, 서적에 굶주리고, Enjoyment에 굶주리고, 모든 빈곤이 나의 몸에 잉태하고 있다. 그보다는 내게 가장 있어야 할 양심과 의지의 빈곤이 큰 부담이다.”





서울의대의 부산 피난시절 교사



* 군의관들, 선진의학을 배우다


교직원과 동문 중에는 개별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군의관이 되거나 민간인 신분으로 군병원에서 활동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미국,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에서 파견되어 온 군의관들을 통해 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등의 선진의학을 배우기도 했다.

서울의대 동문인 이용각은 미 해병대 종군의가 되어 최전선의 이동외과병원에서 미국 군의관들의 조수로 일하며 외과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 의료진이 대거 참가하여 전쟁의학이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그 중에도 이동외과병원은 당시의 첨단의학을 총동원한 꽃이었다. 혈관외과, 인공신장 등이 한국전쟁에서 실용화되었고, 마취과와 신경외과 등도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였다. 많은 미국 전문의들이 와서 우리나라의 젊은 군의관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니, 그들한테 많은 지식과 자극을 얻었다. 말하자면, 대거 미국유학을 간 꼴이 되었다.”

이용각은 이를 계기로 외과의사로 성장했고, 1969년 한국 최초 신장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서울의대부속병원 외과의 젊은 의사였던 심보성은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했다. 특히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 호에 들어가 부쉬 교수의 신경외과 술기를 직접 목격했다. 1952년에는 강원도 양구의 미군 이동신경외과병원에 파견되어 전상(戰傷)신경외과를 전공한 조지 헤이즈 대령에게 4개월간 수련을 받았다. 그는 이 수련을 통해 신경외과 의사로 성장했다.

서울의대 외과 교수로 있다가 부산 스웨덴적십자병원에서 흉부외과학을 전공한 한격부는 한국전쟁 당시 신경외과의 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임상의학은 6.25동란을 전환점으로 하여 눈부신 발전을 했다. 특히 미개척분야였던 신경외과학 방면은 미국의학 수준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의 학문적인 토양을 마련한 것이다. 전상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 분야 임상의학에 대한 새로운 기법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